우리나라는 중국과는 다르고 일본과도 달라서 아나키스트가 별 활동을 못했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 동경에서 아나키스트 모임이 있어서 흑도회 같은 것을 조직했습니다만, 별로 활동을 못하고 다만 박열이 일본 여자와 함께 천황을 죽이려 했다고 하여 크게 떠들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일제가 조작했다는 설이 강합니다. 국내에서도 아나키스트가 평양이나 다른 일부 지방에 있었다고 하지만 별로 활동한 것이 없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아나키스트들이 저 경상남도 안의 지방에서 몇번 집결해서 회의도 열고 했지만 대개는 우익 내지는 극우와 별 차이가 없었고, 볼 만한 활동도 못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정치세력으로서 아나키스트라는 것은 한국에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회영 선생은 아나키스트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상당히 활동하였고 그리고 단재 신채호 선생도 한때 아나키스트에 가담했었습니다. 그 뒤 백정기 의사나 정화암 등도 주로 광동, 남경, 상해 등 중국 관내에서였습니다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습니다. 이회영 선생과 관계가 깊었던 아나키스트들이 1920 년대 후반에 김좌진 장군과도 접촉했습니다. 이회영 선생은 아나키스트로서 대단히 훌륭한 항일투사요 애국자였습니다. 우리가 이시영 선생을 초대 부통령도 지냈고 해서 더 많이 알고 있지만 이시영 선생보다는 바로 한 살 위인 이회영 선생이 훨씬 진보적이고 열렬한 투사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김좌진 장군이 왜 아나키스트로 기울게 되었나 김좌진 장군이 아나키스트로 기울어지기 전에는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상당히 강했습니다. 만주지방은 민족주의세력도 상당히 사회주의적이었습니다. 예컨대 조선혁명당의 강령이나 정책을 보면 대단히 급진적인 면을 띠고 있습니다. 이청천 장군도 가담했고 양세봉 장군도 맹활약을 하게 되는 조선혁명당은 한독당과는 비교가 될 정도로 민중적이었고 진보적이었습니다. 만주지방에서는 진보적인 것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어요.
왜 그렇게 만주는 사회주의세력이 강했는가. 만주에 사는 한국인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오죽못살겠으면 걸어서 혹은 간신히 노자를 만들어서 기차를 타고 북간도까지 갔겠습니까, 얼마나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었으면 고향을 떠났겠습니까. 그리하여 북간도에서 땅을 얻어서 농사를 짓는데 이국에서 땅이 없는 사람이 땅을 얻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또한 얼마나 고생이었겠습니까. 중국인 지주, 한국인 악질 지주에게 당하고 마적떼에게도 뜯기고, 그러니까 만주에 있는 한인들은 민족적인 고통과 함께 계급적인 고통도 대단히 맛보았습니다. 독립군의 자금줄도 이 가난한 한국인들이거든요. 이들에 기대어서 독립투쟁을 하려면 이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단말입니다. 그러니까 민족주의자들도 토지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고, 때로는 농민소비에트를 건설하겠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김좌진 장군도 혁신의회 활동이나 유일당 만들 때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여러 가지 내분 때문에 잘 안됐어요. 재책진회를 만들때도 제대로 안됐고, 그래서 이분이 회의를 갖지 않았을까생각합니다. 그때 북경지방에서 아나키스트로 활약하던몇 분이 김좌진 장군한테 가서 설득하여 원래 보수적 민족주의자였던 김좌진 장군이 아나키스트로 기울어진 것으로기록에 나옵니다. 그것을 공산주의자들은 나쁘게 봤던 것같습니다.
그다음에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냐 아니냐는 것은 확답할 수는 없습니다만, 김두한측 주장이 아니더라도 홍성에 있는 김씨들이 대개 인정을 한다고 합니다.김두한이 비호같이 싸움을 아주 잘하고 협객기질이 있는데 그것이 김장군을 닮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일설에는 김두한이 그의 주장과는 달리 해방 후에야 이범석 쪽에서 알려줘서 자기 아버지가 김좌진 장군인것을 알았는데, 그때 자기 아버지를 공산주의자가 죽였다고 듣고 열렬한 반공투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두한의 전기에 나오는 기록은 거짓말이 많이섞여 있어요. 출생년대는 맞는 듯하지만 출생 면에서도 믿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전기에 따르면 독립군 투쟁을하기 위해서 김장군과 여러 사람들 김동삼이니 노린등이 회의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일본놈들이 알고 급습을 했대요. 김좌진은 도망을 치다가 어느 집 담을 넘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집안에 상궁이 살고 있었는데 상궁에게는 묘령의 딸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 딸이 “이렇게 위대한 김좌진 장군이 우리집으로 피신을 오셨구나 해가지고 잘 모시면서 며칠을 살았대요. 그래서 애기를 가지니까 김좌진 장군이 “아들을 낳거든 두한이라 하고 딸을 낳거든 뭐라고 하라”고 했대요. 그래서 열 달 만에 옥동자를 낳았다는 거죠. 김두한은 자기가 1918년 5월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 열 달 전이면 1917 년 7월이거든요. 그대는 김좌진이 만주로 파견되는 때이니까 시간상으로는 맞습니다. 다만 김두한의 모친이 상궁의 딸이라는 점이 조금은 이상해요. 우선 상궁이 딸을 낳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요.론 조선이 망했으니까 그럴 수 있지 않느냐 하지만 조선이 망한 것은 1910년인데 딸은 분명 10살이 넘었을 거란 말예요. 그것은 좀더 알아봐야 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김좌진 장군이 술을 좋아했는데 그때 ‘사귄 여자가 낳은 것이 아니냐, 거기에서 낳은 것이 김두한일 것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전기에 의하면 7살 때 만주에 가서 실제로 김좌진 장군을 상면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김좌진측 기록에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김두한이 국립보통학교 1, 2학년 다닐 적에 돌아가신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10살 때쯤인데 그것도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어디에 있는지 캐묻기 위해서 일제 관헌이 붙잡아다가 닥달해서 이 때문에 병들어 죽은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그것도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1920 년대 중반경에는 일본 관헌들이 만주나 북경, 상해로 간 독립운동 가족들을 감시는 했지만, 김좌진 장군이 어디있는지 캐묻기 위해서 그들 부녀를 고문했다는 것은 소설적인 냄새가 납니다.
하여튼 김두한은 우미관과 단성사 부근에서 활동하기시작합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아주 싸움을 잘했다는데 특히 비호처럼 날아서 발 차기를 잘했다고 해요. 공주에 붕 떠서 어깻죽지를 차버린다든가, 공중으로 날면서 한손으로 어깻죽지를 잡고서 명치를 쳐버린다든가 턱을 쳐버린다든가 하면 막아낼 장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지요.이렇게 맹활약을 하다가 일제 말에는 이정재와 의형제를맺고 여러 깡패들과 모이게 되었죠. 그 깡패들을 일본놈들이 전쟁에 이용하려 하였고, 실제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이많습니다. 이정재는 김두한의 문서비서를 했다고 전기에씌어 있습니다. 김두한은 보통학교 1, 2학년밖에 다니지못했는데 이정재가 김두한의 부하 중에서는 제일 유식한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중학교까지 다닌 이천출신인데 김두한처럼 덩치가 좋고 힘도 아주 써서 김두한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지만 결국 1950년대의 정치싸움이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죠.
김두한은 해방 직후에 처음에는 좌익 쪽이었어요. 그때는 좌익이 학병 조직이나 국군준비대 조직도 하였는데, 힘패 조직도 좌익이 먼저 한 것 같애요. 유명한 만담쟁이 신불출이 그런 조직에 관계했던 모양이예요. 신불출이 중심이 되어서 김두한도 처음에는 거기에 가담했는데, 일설에는 이범석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공산주의자다 하니까 그때부터 이를 북북 갈면서 우익이 됐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알 수 없어요. 아무튼 김두한은 1945년10월 이후 우익 쪽의 청년단, 즉 윤보선 · 유진산 등이 중심이 된 청년단에서 활동하면서, 1946년에는 그 유명한별동대를 조직해서 9월 총파업 때 최선봉장이 되어 용산철도 공작구에 총을 들이대면서 노동자들을 끌어내어 쳐죽
였다고 자신이 주장합니다. 사실 그때 죽은 사람은 둘 정도밖에 안되는데도 김두한은 자기가 많이 죽였다고 하면서 무용담으로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 뒤에도 돌격대들이 여러 군데를 쳐들어갔는데, 1947년에 가서 굉장히 잔인한 싸움을 벌입니다. 당시 신문에도 자주 나옵니다. 신불출이 만담을 하고 있는 공연장에 김두한의 별동대가 떠가지고 장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신불출도 마구 때려주고, 거기를 지키고 있던 좌익청년단의 정모인가 하는 유명한 힘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붙잡아갔어요. 이 사람은 일제 때 김두한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대요. 해방이 되고 나서 좌 ·우익 싸움에 힘패들도 좌우익으로 갈라진 거지요. 그를 데리고 가서 어떤 식으로 죽였냐면 하여튼 그 덕대가 온 몸이 호물호물하게 되도록 만들어서 경찰과 미군정에서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보도되었습니다. 한국인 경찰 총수가 무척 봐주려고 했지만 워낙 잔혹한 살인이어서 김두한이 미군정의 특별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형판결까지 받고 오키나와인가에 수용되었는데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의 특성으로 김두한은 살아났다고 합니다.
김두한은 1950년대에 국회의원을 두 번인가 하고 1960년대에 또 한 번 했는데, 협객 정치인으로 꽤 활약했습니다. 사카린 밀수사건 때로 기억됩니다만, 똥사건을 김두한이 일으켰죠. 똥을 어디서 퍼왔느냐면 선열들의 똥이다 해서 파고다공원에 가서 퍼다가 정일권 국무총리가 연설하고 있는데 거기에 확 끼얹어버렸어요. 김두한같이 힘 좋은 사람이 뿌려버리니까 똥바다가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김두한이 제명처분을 받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거예요. 중앙정보부가 생기고부터는 깡패들의 세계도 크게 변했다고 합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면 아무리 장사라도 견뎌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김두한도 나와서 흐물흐물해져버렸고, 그리고는 몇 년 안 가서 장안의 협객은 죽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