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함께 존경하는 서민 장군
그런데 조금 있다가 다시 부인하겠지만 일제시기에도국내에서는 무장투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장투쟁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 중국 내륙, 그것도 주로 만주지역에서 일어나게 되고 1930년대 이후에는 관내라고 해서 산해관 안쪽, 곧 중국 내륙에서도 무장부대가 나타나게되지요. 그러나 국내에서는 무기류 소지를 철저히 막았기때문에 원천적으로 무장투쟁이 봉쇄되었습니다.
무장투쟁을 일으킨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사람들중에서 열두 분을 얘기하게 되겠고, 그리고 첫 시간이 바로 홍범도와 김좌진 장군에 대해서입니다. 홍범도 장군은근대의 장군 중에서는 여러 가지 면으로 거론되는 것이 많아요. 남북한에서 동시에 존경하는 독립군 대중 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홍범도 장군입니다. 오동진 장군,양세봉 장군도 괜찮게 얘기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홍범도 장군은 만주에 이주하여 사는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장군이 아닌가 싶어요. 소련지역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사는데, 거기에서도 홍범도 장군에 대한 추모행사니 해서 기념행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1980년대 중•후반에 국내에 들어온 ‘레닌기치」라는 한인사회의 신문을 보면 홍범도 장군을 높이 평가하는 글들이 실려 있어요.그러니까 우리나라 장군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고 존경을 받는 장군이 근래에는 홍범도 장군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좌진 장군은 근래에 와서는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 때문에 역사에 관심이 없는 젊은이들 사이에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1950년대 1960년대에는 청산리 영웅으로 최고인 줄 알았죠.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저는 사실은 전문연구자가 아닙니다. 윤병석 · 신용하 교수 같은 분들이 많은 연구를 하셨고, 소설가인 송우혜씨도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해서 월간중앙에 홍범도에 대해 연재를 하기도 했어요. 또 최근에는 장세윤씨가 ‘홍범도의 생애와 항일의병투쟁이라는 저서를 냈습니다. 홍범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은 1980년대 총 중반에 고송무씨를 통하여 알려졌고, 1991년 여름에 연변에서는 ‘홍범도 장군이라는 중요한 연구서가 출판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에 비해서 김좌진 장군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고, 신뢰할 만한 전기도 없는 형편입니다.
머슴살이, 병사, 노동자에서 의병투쟁으로
그러면 이제부터 홍범도와 김좌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홍범도는 일자무식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약간은 한글을 깨우친 것 같습니다.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던 서민 출신입니다. 출생지는 평북 자성 등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평양의 외성 서문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강합니다. 출생년도는 1868년설, 1869 년설이 있는데 1868년 8월 27일(음력)설이 강합니다. 출생 직후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숙부댁에서 자라다가 좀 컸을 때는 이웃지주집에서 머슴살이를 합니다. 그러니까 평민 중에서도 아주 가난뱅이 평민으로 일찍이 조실부모한 사람이죠. 그러다가 힘이 좀 세고 하니까 머슴살이보다는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만 열다섯 살 되던 1883년 평양에 있는 평안감영의 우영에 입대해서 나이 때문에 정식 병정은 못 되고 나팔수로 복무하게 됩니다만, 기합도 세고 군 내부가 부패해서 견디다 못해 같은 부대 소속의 부패한 군교를 구타하고 4년 만에 병영에서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1888년경부터 황해도 수안의 총령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서 종이 만드는 노동자가 되었다가 1890년경부터 그 이듬해까지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에서 중노릇을 하였는데, 부근의 여승과 알게 되어 그 여승의 고향인 북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인을 길에서 잃어 방황하던 중 철령에서 의협동무를 만나 의병을 모집하여 일병과 싸웠다고 합니다. 이때가 을미의병 때인 1896년 여름이었습니다. 이들은 유인석부대가 평안도와 함경도를 지날 때 합류했다는데, 그 후 황해도 곡산에서 금광노동자가 됐다가-일설에는 단천광산이라고도 합니다-북청에서 부인을 재회했다고 합니다.
홍범도가 가족과 함께 살게 된 북청군 안산사(山)1914년에 풍산군 안산면이 됩니다 이는 포연대(捕隊)라는 포수들의 동엽조합이 있었는데 홍범도는 포연대에 들어간 지 얼마 후 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홍범도는 명포수로 알려졌습니다. 총도 잘 쏘고 의리도 있고 정직하니까 포수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거죠. 그런데 한국정부는 그 당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어디에서든지 세금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포연대에도 세금을 받았기 때문에 포연대장인 홍범도가 관리들과 교섭해서 세금을 깎아야 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는 관군 쪽의 회유를 버티면서 세금을 깎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의병투쟁에서 홍범도 장군의 활약상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미 을미의병 때도 싸웠고 1994년에도 싸웠다고 합니다만, 홍범도 장군이 1907년에 의병투쟁을 하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의병투쟁을 하게 된 동기와는 약간 다릅니다. 의병투쟁은 대개 중부권이나 남부지방에서 1906년경부터 활발하게 전개되다가, 1907년부터는 군인도 많이 가세하여 투쟁의 규모도 커지고 때로는 정규전의 형태로까지 발전해가면서 항일구국투쟁을 벌이게 되지요. 1908년에는 전라도, 소백산맥 일대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아주 활발히 벌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