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

이제 3·1운동 이후의 독립전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얘기한 것처럼 1910 년대는 우리 역사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때도 노령, 연해주에서 열심히 싸웠고 신흥군관학교에서는 많은 인재를 양성했지만, 홍범도도 독립군 전투를 몇 번밖에 못할 정도로 곤경을 겪었어요.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인 조류, 즉 자유와 민족해방, 민주주의를 위한 도도한 대세가 만주, 북경, 연해주, 조선을 휩쓸기 시작했고, 특히 3·1운동은 그런 흐름을 타고 일어난 것이지요. 그 흐름들이 민족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을 일깨워서 독립운동 . 독립전쟁에 뛰어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겁니다.

의병투쟁이 1909년에 약화된 이래로 다시 무장투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것은 3·1운동 이후부터입니다. 그때 국내에서부터 퍼진 왕성한 투지, 새로운 혈기가 규합되면서 대규모 무장투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1운동이 여러 세력이 규합되어서 일어난 것처럼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는 노력도 여러 군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독립운동에서 역시 센스가 제일 빠르고 제일 먼저 착수한 분은 여운형입니다. 해방이 됐을 때도 해방된 첫날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내는 준비를 미리 갖추었던 사람도 여운형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운형은 대단히 탁월한 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먼저 세계 대세를 읽으면서 게말 파샤의 청년터키당을 본받아서 1918 년에 신한청년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크레인이 북경 · 상해에 왔을 때 사람과도 교유하였고,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 한국에 적용될 수도 있을 것이고 꼭 적용되지 않더라도 이 기회에 민족해방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김규식, 장덕수 등과 상의,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여운형 자신은 만주와 연해주 쪽으로 가고 장덕수 등은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2.8독립선언도 장덕수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역시 그때는 동경에서도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어요.3·1운동에서도 신한청년당은 큰 역할을 했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가 있어요.

이때는 노령지방, 북간도지방에서도 독립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1919년 2월 하순에 진로조선인회의가 열리고 3·1운동이 일어날 때쯤 해서는 대한국민의회가 만들어집니다. 이때 노령에서는 각지 대표들이 참여하여 독립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이 독립방안은 곧이어서 상해 쪽에서도 논의되었고, 그리하여 채택된 것이 3단계 독립투쟁이었습니다. 우선 1단계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평화적인 시위운동, 민중운동을 각지에서 벌이자는 것입니다. 각지에서 시위운동을 벌여서 분위기를 돋궈놓은 다음에는 무장세력으로 하여금 국경에서 전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국내무력진공 작전입니다. 그러면서 국외적으로는 파리 베르사이유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대표를 보내기로 해서 신한청년당에서는 대표로 선정되었던 김규식을 노령국민의회에서도 상해임시정부에서도 대표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김규식은 베르사이유회의에 가서 맹활약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외교활동을 하고, 한편으로는 독립군이 국내에 진공하여 싸움을 벌이면서 우리도 교전단체로서 우리 스스로 임시정부도 세워보고 국제적인 여론에도 호소해서 독립국가를 이룰 수 있도록 해보자. 우리가 일본과 교전한다면 국제적으로 우리에게 지원을 해줄 것 아니냐 하는 점도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논의는 상해 쪽에서도 활발하였는데 특히 이동휘 장군이 이런 주장을 강하게 했습니다. 이동휘는 노령에서 활동하다가 1919 년 9월에 상해로 가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부르주아세력을 대표하는 안창호 쪽과 일을 같이 했습니다. 상해운동의 양대 세력은 안창호세력과 이동휘세력인데, 거기에서 이동휘는 노령 쪽에서의 3단계 작전을 주장했죠. 그래서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펴도록 최대의 지원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안창호 쪽에서는 시기상조다. 더 준비하자는 준비론을 폄으로써 결국 이동휘 장군 등은 준비만 해놓고 제대로 못 싸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것을 실천한 쪽이 홍범도부대 하나라고 말할 수 있어요.

3·1운동 직후 홍범도는 독립군을 만들기 위해 무기를 구입하고, 5월에는 과거의 의병과 새로 청년들을 규합하여 약 200 명 되는 대한독립군을 창설하였습니다. 대한독립군은 유고문(文)에서 “당당한 독립군으로 몸을 포연탄우(彈雨)중에 던져 반만 년 역사를 광영되게 하며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줌이 우리 독립군의 목적이요,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다”라고 외치어 기개를 높였습니다. 이 대한독립군이 경제적 지원을 받을 겸 1919년 겨울에 북간도국민회에 참가하게 됐어요. 북간도국민회는 3·1운동 이후 북간도에서 대규모 시위투쟁을 벌였을 때 조직된 것으로 3 · 1운동 이전부터 이미 상당히 조직적인 활동을 했어요. 그래서 3 · 1운동 이후에는 회장에 구춘선을 앉히면서 조직을 재정비했던 것입니다. 이 북간도국민회에는 안무를 필두로 한 부대도 있었고, 최진동 삼형제가 거느린 부대도 여기게 가담하게 되는데, 역시 대표적인 부대는 홍범도 부대이지요. 후에 홍범도부대는 안무의 국민회군과도 합류하게 됩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의 국내진격작전은 꼭 노령 쪽과 연결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홍범도 장군 스스로, 그리고 북간도국민회 쪽에서도 국내로 진격해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해서 홍범도부대가 국내진격작전을 펴게 된 겁니다. 곁들여서 한마디 한다면 군대를 이끌고 국내에 진공한 것은 홍범도부대가 이 시기에 수차례에 걸쳐서 했고, 그 외에 몇몇 부대가 들어간 것을 제외한다면 1937년에 김일성부대가 국내진공작전을 피 보천보를 점령한 것이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국내진공작전은 홍범도 장군 부대와 김일성부대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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