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은 장백산맥에 있는 봉오동을 기지로 해서 1919년 8, 9월에 혜산진, 갑산 일대의 수비대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10월에는 강계, 만포진을 습격했고 자성에서는 일본군과 3일간이나 격전을 벌여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고 합니다. 어떤 책에는 혜산진도 한때 장악했다느니 만포진도 장악했다느니 하는 말이 나와 있는데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 지역을 장악했던 것 같지는 않고 다만 홍범도부대가 워낙 날쌘 부대이기 때문에 번개처럼 치고 달아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홍범도부대는 1919년 말에서 1920년 초에 노령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때는 이미 시베리아 지역에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을 막고 백군을 후원할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켜 침략하던 때입니다. 캐나다부태, 프랑스부대, 미국부대 등 각 나라의 부대가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이 일본군대였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 연해주에서는 한국인들이 많이 죽었고, 상황도 미묘해서 한국인 독립운동이 아주 복잡하게 전개되었는데, 홍범도부대도 이대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독립군이 알차게 무장력을 갖출 수 있었던 데는, 그래서 나중에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 당시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민족애가 들끓어오를 때였으므로 모두다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군자금이 많이 모였습니다. 국내에서도 자금이 많이 걷혔고 북간도 일대에 사는 조선인들도 돈을 많이 냈고 연해주에서도 상당히 많이 냈어요. 독립운동세력이 군자금이 가장 풍부한 때가 이때였습니다. 군자금이 많으니까 무장투쟁을 할 수있는 기반도 강고해졌습니다. 3·1운동의 열띤 분위기 속에 모두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돈을 내놓겠다고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 시기에는 무기 구입이 아주 쉬웠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 시기에는 시베리아에서 각국의 수많은 부대가 뒤죽박죽 싸움을 벌여 아침에는 이 패가 붙더니만 다음날에는 다른 패가 와서 붙고, 체코군단까지도 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대에서 총을 빼내기가 상당히 쉬워졌어요. 부대 중에서 도망가는 부대도 있고 돈 벌려고 오는 부대도 있고 별별 것들이 다 있거든요. 군자금도 많았을 때인 데다 대량의 총포를 살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도가능했던 겁니다.
홍범도부대는 소련의 멘세비키 연해주 당수 등과 교섭해서 장총 500정, 탄약 10만 발을 얻은 것으로 자료에 나와 있고, 1920년에는 다시 노령에서 기관총 7문, 군총200여 정을 입수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홍범도부대는북간도의 안도현, 왕청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 4월 초에는 다시 700여 정의 무기를 역시 노령에서 반입해서 상당히 많은 무장력을 갖추게 됩니다. 또 그의 대한독립군은 군무도독부(軍務親督府, 지휘관 최진동)라든가 안무의 국민회부대와 합쳐서 연합부대로 편성됩니다. 엄격하게 편성된 부대는 아니라 하더라도 새로 편성된 부대에는 독군부장(督軍府長)에 최진동, 부관에 안무, 연대장에홍범도가 앉았고 주로 봉오동 일대에서 활약하였습니다.이때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가 약 550명 총 1천 2백여 명으로 일제측 자료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나이가 많았음직한 홍범도가 왜 일선 사령부직을 맡았는가,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홍범도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에요. 아무런 기반도없는 사람이 산포수를 데리고 싸운 거니까 국민회의 실세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북간도국민회는 역시 구춘선이나 안무, 최진동이 실세에 가까웠고 경제적으로나 조직적으로도 이쪽이 실세였기 때문에 그런 점이 작용하지않았겠는가 싶고, 또 하나는 홍범도는 항상 앞장 서서 싸우기를 좋아했다는 겁니다. 역시 전장에 서야지만 실력을발휘할 수 있으니까 전선사령관 직책을 맡은 것이 아닌가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부대들이 계속 종성, 온성, 무산 등함경북도 일대와 백두산 부근에서 왜군을 공격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