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서 청산리전투와 함께 1920 년대 최대의 전투라고 얘기되는 봉오동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봉오동전투는 두 개의 규모로 벌어졌습니다. 하나는 삼둔자전투라고 해서 안산과 고려령에서 붙은 전투를 가리키고, 그다음에 바로 옆에 있는 봉오동으로 끌고가서 거기서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를 일컫는데, 이 두 개를 합쳐서 봉오동전투라고 합니다. 당시 조선군사령부는 나남과 용산 두 군데에 있었는데 나남에 있는 것이 유명한 19사단입니다. 이전투에는 이 19사단의 야스카와(川) 소좌가 이끄는 대대가 급파됐습니다. 이 전에 이미 니미(美) 중위가 거느린부대가 국민회군에게 대패했죠. 일제는 니미 중위가 이끄는 남양(南陽)수비대 병력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종성 부근을 진격했다 돌아가는 독립군을 추격케 했는데, 독립군은 이들을 6월 4일 삼둔자 요지에서 매복하였다가 섬멸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이 삼둔자전투예요. 여기서 패배를 하니까 다시 19사단에서 대대병력을 파견한 건데 이것을 봉오동에서 또 패퇴시킨 것입니다. 일명 봉오골인 봉오동은 삿갓을 뒤집어 씌어놓은 것처럼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천연 요새지였습니다. 입구에서부터 하 • 중 · 상동의 마을이 30~60호씩 모여 있는 마을인데, 6월 6일 야스카와 소좌 지휘하의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7일 새벽 작전을 개시해왔던 것입니다.
홍범도는 일단 주면을 산으로 대피시킨 후 고려령 서현을 거쳐 진군해오는 일본군을 1,200미터 되는 고지 등에 독립군을 매복시켜 적을 유인하였습니다. 유인작전은 새벽 3시 50분부터 5시경까지 전개되어 적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가, 아침에야 겨우 전열을 재정비하여 봉오동 하동을 유린하고 중동 상동을 향하여 진입해왔습니다. 이때 홍범도의 신호에 따라 집중사격이 개시되었고, 3시간여의 전투 끝에 적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봉오동 승첩으로 ‘독립전쟁의 개전’, ‘독립전쟁의 제1회 회전’ 이란 이름을 남기게 되었고, 의병장 홍범도의 명성은 이제 독립군 장군으로 더욱 떨치게 되었습니다. 전투로 일본군 전사자가 157명 부상자가 중상 2백여 명, 경상 1백여 명이 발생했다고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발표하였는데, 일본군에서는 얼마 안 다쳤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아마 조선인 독립군에게 졌다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입니다.
홍범도부대는 큰 손실을 입지 않고 노두구 쪽으로 피했는데, 이 노두구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져서 일본 영사관 순사대 22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운동, 독립군 활동, 그리고 침략자들에게 큰 영향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제측은 야스카와 추격대의 보고서에서 “적(독립군)은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지형에 의지하여 방어할 때는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또 용감하게 싸운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독립군을 철저히 ‘토벌섬멸하기 위해 새로운 대규모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독립군은 이 승첩으로 크게 사기가 높아졌고, 이제 독립전쟁은 개시되었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독립군과 일제의 전쟁은 제2라운드 골 청산리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