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의 전야

남한에서는 청산리전투 하면 김좌진 장군을 연상하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들은 과연 누구인가하는 점에 초점을 두어 청산리전투를 살펴보겠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부대는 북로군정서에 속해 있습니다. 1910 년대에 북간도 일대를 포함해서 만주 일대는 대종교 신자들이 많았어요. 그 중 서일은 대종교에서 신망받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서일이 중심이 되어서 중광단(光團)을 조직했고, 그것이 3 · 1운동 후에 정의단으로 확대개편되었다가 1919년 가을부터 대한군정서로 되었습니다. 이때 김좌진도 주요 인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대한군정서는 창설 후 임시정부에 지지의 뜻을 알렸고 그해 12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북로군정서’를 명명받았습니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19살인가 20살이었던 이범석은 연성 대대장이 되었습니다. 이범석은 16살 때 중국으로 망명해서 1919년 3월에 운남에 있는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만주로 와서 신흥군관학교 군관이 됐는데, 김좌진 장군이요청해서 1920년 4월에 북로군정서 교관이 된 겁니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병력이 꽤 많았어요. 훈련된 병력 6백여명에 기타 병력을 합쳐 총병력은 약 1,100명이었고, 총기가 권총 40정, 장총 800정, 기관총 4문, 포 2문 등이었습니다. 왕청현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해서 수백 명을 교육시키고 있었는데 소장은 김좌진 장군이고 이범석은 교관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이렇게 홍범도부대 등 독립군부대가 확대 개편되고 무기도 많이 입수되어 장백산맥 일대의 한 · 만 국경지대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지니까, 중국측은 중국측대로 긴장되고 일본측은 일본측대로 더이상 놔두어서는 안된다고 대병력으로 침략하여 완전히 독립군을 때려잡아야 한다는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군이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는 것은 침략이기 때문에 그것을 호도하기 위해일본군이 자주 그랬듯이 위상 기만책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마적단을 이용하였던 겁니다. 1920년 9월 25일 장강호를 우두머리로 한 마적떼들을 출몰케 하여 일종의 자상전벌이게 합니다. 일본인까지 죽여야만 그것을을구실 삼아 만주로 출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적단은 한국인, 중국인도 죽였지만 훈춘을 공격해서 일본인까지 죽이게 되었고, 이 훈춘사건을 구실 삼아 일본이 대규모 병력으로 침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이미 일부 부대가 나와서 한국인 촌락들을 덮쳐 방화, 살인, 강간을 저질렀는데 이것을 훈춘의 1차학살이라고 부르고, 청산리전투 이후에 벌어지는 잔인무도한 경신대학살, 훈춘대학살을 2차 학살이라고 합니다.

일제의 소위 대규모 토벌부대는 5개 부대로 편성되었다고 하지만 주력사단은 역시 19사단입니다. 실병력을 따지면 2개 사단 2만 명 내외의 병력이 출동하는데 항공대까지 떴고 규모가 큰 포병대라든가 중포까지 떴으니 상당히 큰 병력이었습니다. 예컨대 여단 병력만 해도 두 개의 여단 주력이 움직인 것을 볼 수 있어요. 하나는 육군 소장 이소바야시가 거느린 이소바야시 지대였고, 다른 하나는 아즈마() 지대입니다 이것이 청산리전투의 주역을 맡게되는 부대입니다 이 두 개 여단의 중심부대가 떴으니까 상당히 큰 병력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또 한 연대를 붙여줬습니다. 육군보병대좌 기무라(木村)가 거느리고 있는 기무라 지대인 보병 76 연대가 그것입니다. 이밖에 시베리아에도 출병하고 있었던 28여단이라든가 20사단도 가담했지요.

그런데 이즈음 중국측의 입장을 보면 담담하고 큰일났단 말이예요. 한 · 만 국경에서 계속 이렇게 싸움이 붙으면 남만이나 시베리아에 출동하고 있는 일본군대가 만주로 들어올 것은 거의 틀림없거든요. 중국은 겁이 나니까 독립군들에게 “해산하라, 해산하지 않으면 가만 안 두겠다. 그렇지 않으면 산 속으로 멀리 도망가서 일본군의 눈에 띄지 말아라. 계속 그렇게 싸우면 일본군이 대규모로 올 것 아니냐”하면서 사정 겸 공갈협박을 하게 됩니다. 독립군들은 중국군과 싸워가면서까지 독립운동을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적이 또 하나 생기는 것이니까, 그런데 만주 땅에서 독립운동 하려면 중국측 입장을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홍범도부대인 대한독립군은 8월 하순 사관학교까지 건립한 본영을 떠나 백두산목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하여 9월 20일경 안도현과 접경인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村) 부근에 도착했으며 안무의 국민회군도 9월 말경 이도구지방에 도착했습니다. 북로군정서는 인성학교 졸업생들이 3백 명 가까이 있었는데 졸업식을 하고 나서 옮겨야 했으므로 9월 중순부터 옮기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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