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독립전쟁의 전개

다시 이야기를 청산리전투로 돌리지요. 중국측의 독립군 해산 요구에 홍범도부대와 북로군정서는 새 항일기지인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등의 밀림지대로 10월 상순까지 진군해 들어왔는데, 당시 독립군은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한 북로군정서 약 6백 명, 홍범도부대는 약 3백 명 등의 직속부대원과 연합부대를 합쳐 약 6백 ~ 8백 명, 기타 부대를 합쳐 약 2천 명이 포진하였고, 총출동한 일본병 2만 명 가운데 상대편인 일제의 아즈마 지대는 5천 명이었습니다.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10월 19일 연합작전을 협의하였는데, 일본군과 싸우지 말자는 주장이 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만주에서 계속 독립군을 양성해서 큰 규모로 일본군과 싸워야 하는데 지금 싸우면 중국측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고 일본이 만주에 증파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만들어놓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독립군의 활동에도 더 많은 지장을 받게 되니까 지금 여기서는 일본의 대규모 병력과 직접 싸우지 말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기회를 기다리자 해서 많은 토론 끝에 그렇게 따르기로 했는데, 김좌진부대나 홍범도부대나 “지금 싸워야지 싸우지 않고 어디로 피전한단 말이냐?”고 반대하는 부하들을 설득하느라애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단 피전키로 결정이 나서 삼도구, 이도구의 밀림 속으로 들어간 거죠. 그런데 이때는소위 일본군 토벌대가 이미 깊숙이 들어왔을 때였어요.

제일 먼저 붙은 전투는 삼도구에서의 청산리전투입니다.1920년 10월 21일 아즈마 지대의 야마다(山田) 연대 중야스카와(川) 소좌가 이끄는 부대를 백운평 일대의 고지에 매복해 있다가 공격하여 약 2백 명으로 추산되는 이 부대를 섬멸하였습니다. 야마다 연대의 주력은 기관총 산포(砲)를 앞세워 참패를 만회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지요. 그리고나서 북로군정서는 싹 빠져서 갑산촌으로 이동했고, 침략군은 저희들끼리 자상전을 벌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홍범도부대의 공격을 받아 약 4백여 명의 전사자를 냈습니다. 이것이 홍범도 연합부대가 10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벌인 완루구승첩입니다.

그다음의 전투는 이도구인 천수평 일대에서 벌어집니다.이 전투를 이범석은 대단히 혁혁한 전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김좌진 장군 부대는 야마다 토벌대와 싸운 다음에14 시간의 굉장한 강행군 끝에 멀리 떨어진 갑산촌으로 옮긴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몹시 피곤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여기에 바로 아즈마가 중포대, 기병인대까지 끌고 지키면서 작전을 짜고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들어온 것이었지요. 그래서 보니까 일본군 기병대 초소가 있어서 선제공격하여 대부분을 죽였어요. 22일 새벽 미명(未明)이었어요.그렇게 되니까 아즈마 지대가 본격적으로 달라붙어 격렬한 혈전을 벌인 것이 유명한 이도구 어랑촌 부근의 승첩이었습니다. 22일 오전 9시부터 종일 싸운 대결전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독립군은 밀림 속으로 피신하느라고 식량이 거의 없었습니다. 독립군 중대장의 보고문에서 생생하게 말하고 있듯이, 사흘 동안 감자 두 개밖에 못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나무 껍질을 뜯어먹고 솔잎을 떼어서 먹고, 그것도 모자라니까 촛대까지 먹었답니다. 밤에 행군하려면 초가 있어야 하는데 배낭 속에 있던 그것까지 빼먹을 정도로 그렇게 어려운 상태에서 강행군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북로군정서 약 6백 명은 홍범도부대의 1천여 명과 함께 약 5천 명 가량의 아즈마 지대 주력과 대단한 혈전을 벌였습니다. 처음에는 북로군정서 부대가 아즈마 부대와 혈전을 벌였는데, 이때 홍범도부대는 북로군정서 부대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유리한 고지에서 계속 독립군이 공격하니까 일본군은 분산되었고, 결국 그날 밤 아즈마 부대는 군대를 수습하여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북로군정서측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이 전투에는 자신들만이 참가했다고 주장했고, 그 점은 이범석의 우등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자료는 여러 곳에서 수많은 일본군을 전사시킨 어랑촌 전투의 주력은 홍번도부대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피로한 북로군정서 부대가 격전을 치를 때 나타난 부대, 그리하여 아즈마 지대의 주력부대를 싹 돌리게 한 부대가 바로 홍범도부대였던 것이지요. 홍범도부대가 나타나 아즈마 지대의 주력이 그쪽으로 바뀌어 싸우게 됨으로써 북로군정서 부대가 다시 맹렬히 싸울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요. 하여튼 이때부터 홍범도부대가 만나서 싸우기 시작하여 어랑촌 부근 전투 이후부터는 북로군정서가 싸우는 것은 별로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그날부터 26일까지 계속 쫓기고 쫓기는 싸움이홍범도부대와 일본군 아즈마 지대 사이에 벌어지게 됩니다. 수많은 전투가 있었는데 결국은 일본군이 홍범도부대를 더이상 추격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일본측 기록인 ‘간도출병사에 기록하고 있어요. 도저히 힘을 붙여서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이지요. 이 전투가 청산리전투의 마지막 혈전인 고동하河)전투로, 일본군이 홍범도부대를 야습했다가 오히려 패주한 싸움이었습니다. 10월 25일 한밤중부터 26일 새벽까지였습니다. 일본군 부대의 기록에는 “적도(賊徒=독립군)의 내습에 대비하여 부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군대를 집결했다. 그때 동쪽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우리 장병들은 얼굴에 희열의 빛이 나타났다”고 묘사되어 있어요. 홍범도부대한테 얼마나 당했으면 더이상 추격할 힘도 갖지 못하게 되고 사병들이 해가 뜨니까 이제 살았다고 하면서 도망가려고 했겠어요? 이 전투로 유명한 청산리 독립전쟁은 끝났습니다. 이때 청산리전투에 참여했던 일본군의 기록에는 홍범도에 대한 평이 나와 있어요.

“홍범도는 일반 조선인, 특히 휘하에 있는 자로부터는 하느님같이 숭배를 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독립군이 분열된 것을 탄식하면서 또 단호하게 일본군과 싸울 태도가 없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노하고 있다. 그래서 단독행동을 통해서 수차례에 걸친 국경 습격을 자행한 자이다.” 이런 식으로 홍범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이 얼마만큼 패배했는가는 양쪽 기록이 워낙 차이가 나니까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측 기록에 의하면 적의 전사자가 기병대대 연대장을 포함해서 1천 2백여 명인 것으로 나와있고 우리 전사자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약 60여명으로 추산됩니다.

청산리전투에서는 독립군도 잘 싸웠습니다만, 우리 동포들이 헌신적으로 열렬히 지원했다는 점을 아주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군자금을 내어 무기를 마련할 수 있게 하였고, 식량과 피복도 마련하였습니다. 청산리전투에서는 직접 밥을 지어 독립군을 독려하기도 하였고, 정보를 탐지하여 각종 연락을 해줌으로써 독립군이 적절하게 전투를 치를 수 있게 했습니다.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 후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중국측의 요구도 있고 해서 우리 독립군들은 이제는 중·소국경지대로 모이게 됩니다. 밀산이라는 곳이었지요. 여기에서 다시 부대를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총재에는 북로군정서의 서일을, 부총재에는 홍범도 · 김좌진 · 조성환을 모시게 되는데, 이 당시 병력이 3천 5백 명쯤 됩니다. 그 이후에 자유시참변이 일어나면서 독립군들이 각지로 흩어지게 되고 큰 활동은 별로 못하게 되지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청산리에서 크게 패배한 일본군은 1920년 10월 말 한국군에게 11월부터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경신대학살이 그것이예요. 서북간도를 비롯해서 만주 각지에서 아주 지독한 만행을 저지르고 독가스도 사용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자료에도 이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한국인을 죽였는가하는 것이 생생하게 나와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조선동포들을 죽였는지, 도처의 마을에서 남자란 남자는 거의 죽이고 어린애들까지도 잔혹하게 죽였어요. 한 자료에는 7천여 명을 죽인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강훈 선생은 2만명 이상을 죽이지 않았겠는가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고 나서는 그 유명한 관동대지진학살로 만 명 가까이 동경에서 우리 동포가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의 대전투의 주역으로서 맹활약을 한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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