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쟁의 주인공은 왜 왜곡되었나

앞에서도 얘기를 했습니다만, 남한에서는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김좌진과 이범석이 이룬 것으로 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홍범도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연변에 갔다온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연변에서는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가 싸웠지 김좌진은 별로 싸운 것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해서 지나치게 홍범도 위주로 생각하는듯합니다. 김좌진추모회 쪽에서 연변에 청산리전투의 비를 세우러 갔다가 냉대를 받았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아마 이것은 그 지방에서 김좌진이 친일파 노릇을 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이제 이 부분을 약간 살펴보겠습니다. 역사란 얼마나 엄청나게 왜곡될 수 있는가하는 한 실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먼저 이 청산리전투의 청산리가 어딘지를 보겠습니다. 우리 교포들인 중국의 조선족들이 쓰는 청산리는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로, 이 삼도구의 삼림 속에 있는 빈터에서 일어난 싸움을 좁은 의미의 청산리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삼도구를 청산리로 부르기 때문이지요. 삼도구나 이도구는 중국말이고, 우리말로는 이도구는 어랑촌, 삼도구는 청산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청산리전투는 사실 이 시기인 1920년 10월 하순에 붙은 전투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 청산리에서 붙은 삼도구 싸움이 제일 컸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그 뒤의 어랑촌 싸움과 고동하 싸움도 컸단 말이예요. 그렇게 때문에 이 싸움은 당연히 이도구 싸움이라든가 고동하 싸움까지를 다 포함시킨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명백히 청산리전투에서도 홍범도 장군이 중요한 역할, 어쩌면 김좌진 장군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일본측 자료에 많이 나옵니다. 일단 이 자료들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들이 다 사실대로 기록한 것은 아닐지라도 홍범도가 예뻐서 그렇게 많이 썼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면 왜 청산리전투가 그렇게 왜곡되게 알려졌는지 작가 송우혜씨의 설명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 청산리전투가 있은 직후에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이나, 또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에 온보고문이나, 박은식 선생이 쓴 ‘대한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홍범도 장군이 맹렬하게 잘 싸웠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북로군정서(대종교세력) 쪽의 보고문에는 홍범도 장군이 싸운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범석도 북로군정서에 속해 있었지만 북로군정서에서는 요새말로하면 라이벌의식 때문인지 홍범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청산리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1941년경 이범석이 중국 백화문으로 쓴 『韓國的憤怒』에 실려 있습니다. 이것을 나중에 한국에서 번역해서 한국의 분노』로 냈는데 이 책에서 이범석은 청산리전투에 이도구전투를 포함시켰는데도 불구하고 홍범도가 싸웠다는 얘기는 쓰지 않았어요. 여기에는 이범석 혼자 제일 맹렬하게 잘 싸운 것처럼 다른 「조선독립운동』 2권에 실리기도 했고, 간도출병사』 이름그대로 해서 김정주의 ‘조선통치자료」에도 실렸고, 강덕상이 펴낸 『현대사자료』27, 28권에도 실렸습니다. 여기를 보면 홍범도가 많이 싸운 것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진실이 드러나니까 이범석은 1971년에 우리가 잘 아는 우등불을 냈습니다. 이 책에서 청산리전투를 “청산리의 혈전”이라는 소제목으로 약 70 페이지 정도 썼는데, 여기서도 홍범도부대를 아주 고약하게 묘사했습니다. 청산리전투 직전에 일본군이 출동한다는 얘기를 듣고 각 독립군이 모여서 연합작전을 펴기 위한 작전회의를 열어 각각 작전지역을 분담받았는데, 홍범도부대는 일본군대 병력이 큰 것을 보고 무서워 벌벌 떨면서 밤에 탈주를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탈주하다가 일본군 포위망에 걸려서 떼죽음을 당했고 집단적으로 무기를 뺏겼는데, 앞에서 말한 자료집에 실려 있는 무기는 홍범도부대가 뺏긴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우등불」에서는 그것 말고도 홍범도에 대해 나쁘게 묘사해놓은 부분이 많습니다.

하여튼 청산리전투의 ‘영웅’이 썼다는 우등불」에 이렇게 실려 있으니 우리는 그때까지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범석은 대한민국에 큰 공로자 역할을 했단 말이예요. 왜냐하면 김구, 조소앙 등 중경임시정부 원로들은 5• 10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 초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으니까 이승만정권의 도덕성과 정당성에 상당한 역할을 한 거죠. 그리고 부산정치파동 내무부장관이 되어 이승만독재를 위해 악역을 열렬히 수행하였고, 자유당 창당시에는 ‘족청계’ 총수로서 그 주역이 되었다가 너무 세력이 커지니까 이승만이 두려워해서 숙청을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한때 국어교과서에는 이범석이 청산리에서 싸운 활약상이 활극처럼 자세히 실렸었어요. 그리고 역사책에도 청산리전투를 아주 부각시키면서 김좌진, 이범석이 주로 싸운 것처럼 되어 있었고, 우등불맨 끝에 있는 이범석 약력에도 “청산리혈전 지휘”라고 씌어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로 이범석이 싸운 것처럼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등불」이 나온 다음에도 사람들은 홍범도는 싸우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렇게 10여 년을 믿었어요. 그러다가 1984년 학술회의에서 신용하 교수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청산리전투에서는 홍범도 장군도 많이 싸웠다.” 그것을 훨씬 강한 톤으로 언급한 분이 작가 송우혜씨입니다. 그분이 「신동아」에 투고를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신동아에 있던 때였는데 글을 보니까 아주 놀라운 얘기가 실려 있단 말예요. 그래서 이건 꼭 실어야겠다 해서 신동아 1984년 9월호에 싣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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