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마고원의 명사수

그런데 홍범도부대는 개마고원, 백두산 일대에서 짐승들과 싸우는 것이 생활이었고, 짐승 중에서도 제일 무섭다는 백두산 호랑이와 싸워야 했습니다. 백두산 호랑이는 지금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이따만한 짐승이 등잔만한 눈에 불을 키면서 바위에 웅크리고 있다가 펄쩍 뛰어서 채는 날이면 그 발톱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다. 한번 뛰면 천 리를 달린다. 이런 식으로 소문나 있던 것이 백두산 호랑이입니다. 이 호랑이가 화등잔만한 눈으로 번개같은 불을 번쩍 키고 뛸 때 총을 쏴서 죽여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산포대입니다. 특히 개마고원은 예부터 호환에 시달려왔습니다. 그러니 홍범도 부대는 홍범도만 백발백중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싸움을 잘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총도 나빴어요. 그 화승총을 가지고 백두산 호랑이를 잡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노련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그리고 짐승과 싸우려면 지형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람들이 개마고원 일대의 지형지물을 훤히 꿰고 있었어요. 1,335 미터나 되는 후치령에서부터 삼수, 갑산, 풍산일대에 이르기까지 자기들 발을 거치지 않은 데가 없단 말입니다. 어디서 매복하고 어디로 피신해야 할지를 잘 알고있었어요. 그러니까 일본군이 골탕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먼저 매국주구인 일진회를 소탕하기 시작하였고,후치령에서부터 첫 전투가 붙었습니다. 1907년 11월 22일 안산 · 안평 두 사(社) 포수들의 총포를 빼앗아 북청으로 가려는 일본군경을 후치령전투에서 사살하였고, 같은날 우편물 호위 일군도 저격하였고, 다음날에도 같은 지점에서 일본군 아라다니() 일행을 전멸시킨 다음에 증파되어온 군대를 유인해서 또 쳤습니다. 그 중 11월 25일 세시간 동안 치열하게 붙었던 일본군 수비대와의 전투는 후치령전투 중 가장 컸습니다. 일본군의 절반이 넘는 3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의병도 상당수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렇게 후치령 일대에서의 전투가 널리 알려지자 각지에서 합류해와 홍범도-차도선부대는 3백 명의 의병진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갑산, 후치령, 삼수 혜산진, 풍산일대에서 계속 싸우다가 12월 29일에는 삼수성을 진격하여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연말인 12월 31일의 싸움에서도예컨대 중평장, 삼수에서 홍범도부대가 격전을 벌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홍범도의 포수의병대는 신출귀몰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던 겁니다. 소백산맥의 이강년 의병장부대와 함께 홍범도부대는 한국게릴라전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당시 일본군이 홍범도부대와 싸우는 데 애를 많이 먹자 한편으로는 증원군. 후원군을 계속 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회유공작이라는 것을 펴게 됩니다. 그래서 북청에서 함흥 일대의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동원됐다는 것은, 다른 기록에도 나오지만 한설야가 1930년대에 쓴 자전적 소설인 탑이라는 작품에도 나옵니다. 한설야가 신식학교를 다닐 때는 홍범도부대가 민간인 후원부대 같은 데를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북청, 함흥 일대에서 돈 있고 유지인 사람들은 왜놈들을 통원해서 홍범도부대를 잡기 위한 작전을 썼는데, 홍범도부대와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겠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산포수들은 생활이 아주 곤란한 사람들이니까 유혹에 약할 거다해서 회유작전을 쓰게 됩니다. 이게 부분적으로는 성공했어요. 차도선이나 태양욱도 회유를 당하여 의병 2백여 명을 이끌고 3월 17일 소위 귀순을 하였습니다. 그랬다가 나중에는 다시 탈출해서 홍범도와 함께 투쟁하게 되고, 태양욱은 일제한테 기만당한 것을 알고 저항하다가 처형당했습니다.

일본은 1910년경에 한국을 완전히 침탈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에 1908년경부터 소위 의병 대토벌이라는 것을 실시합니다. 엄청난 규모로 소백산맥, 전라도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지는 작전을 핍니다. 3·1운동 때 전라도 사람이 크게 가담하지 못한 것은 이때 워낙 많이 죽어서 그랬던 거예요. 한번 당하고 나면 투쟁력을 다시 복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1909년 하반기쯤 되어 남한 각지의 의병들은 소수부대만 남고는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홍범도는 차도선이 떨어져 나간 뒤 부대를 개편하고, 산포수와 농민, 광산노동자들한테 호소하여 1908년 4월중에는 다시 4백여 명 규모의 의병이 되었습니다. 4월 12일부터 갑산, 삼수 등지에서 싸우다가 27일에는 평북까지 진출하여 일제의 강계수비대와 격전을 치러 32명을 사살하였습니다. 그 뒤 일본군은 증파된 군경 병력으로 공격해왔지만 6월에도 장진, 함흥, 홍원, 갑산 일대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7월 이후 아무리해도 점점 어렵게 되어 두만강 부근에서 의병투쟁을 하던 안중근부대와의 연합을 모색했지만 안중근부대도 패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안중근은 테러를 택하여 1909 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게 되지요. 1908년 11월경 홍범도부대도 국경을 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약 60회 정도의 전투를 치른 것으로 집계됩니다.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간 홍범도는 1909년 2월 연수에서 이범윤을 만나 재기를 의논하였고, 이 무렵 안중근을 만났다고 합니다. 1910년 4월 간신히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국내에 진입, 5월 함경도 무산과 성에서 일병과 접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러시아로가 유생의병장인 유인석, 이범윤 등과 함께 1910년 6월 13도의군’을 조직하였습니다. 그 뒤 다시 ‘국내진입작전’을 꾀하였고, 권업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으면서 1919년까지 국내 진출의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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