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의 지리적 특성
홍범도는 의병장 가운데 북간도지방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북간도는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제일 많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싸운다는 것은 그만큼 투쟁을 잘할 수 있는 면이 있고, 또 북간도는 바로 무산, 온성지방으로 해서 함경북도와 연결되고 혜산진 쪽으로 해서 장백산맥을 타고 함경남도와 연결되어 국내진공작전이 용이한 지역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독립군 활동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북간도 독립군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역시 홍범도, 최진동, 안무였고, 나중에 북로군정서도 이 지역에서 상당기간 활동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어떻게 무장독립투쟁이 가능했는가하는 점입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국내에서는 원천적으로 무장투쟁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총기류는커녕 도기류도 제대로 갖지 못했고 또 세 명 이상은 모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데라우치 (寺內)가 총독으로 와서 경성 부근에 사는 사람으로 세 명 이상 모이면 잡아가라고 헌병대에 지시를 내렸는데 경성일대에서만 지켜진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어요.
국내에서 독립투쟁을 하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독립투쟁입니다. 특히 민중을 배경으로 해서 무장투쟁이나 노동투쟁이나 정치투쟁을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독립투쟁인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국내 다음으로 독립군 투쟁이 가능한 곳이 어디냐면 만주와 연해주였어요. 상해나 북경, 미국 등 다른 지역에서는 투쟁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이 많지 않으니까요. 만약 그 당시 만주와 연해주가 국가주권이 확고하게 선 땅이었다면 독립투쟁을 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예컨대 19세기 후반만 해도 청나라가 만주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 땅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1910 년 전후부터 1931년까지는 만주는 거의 주인이 없는 땅처럼 되다시피 했어요. 이 시기에는 청조나 중국 중앙정부의 힘이 만주에 미치지 못해서 독군(이나 군벌이 할거하게 되었고, 그래서 봉천을 중심으로 해서만 군벌의 군대가 약간 장악을 하고 있었지 다른 지역은 충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후부터 북간도는 한국인이 대거 들어와 살게 되어 한국인 땅이 되다시피 했고, 간도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 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러시아도 1905 년 이래로 약화되기 시작해서 제1차 세계대전 때도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고 1917년 2월부터 혁명이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1917 년부터 1922년까지는 연해주도 무주공산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수많은 정파가 난립해서 싸우고 일본군, 캐나다군 등이 시베리아에 출병해서 여러 나라 군대가 제멋대로 와 있었고, 심지어 한 대는 체코 군단까지 그 지방에 와 있어서 독립군이 활약을 할 수 있는 물적·지리적 요건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제일 괄목할 만한 투쟁을 초기에 벌이는 대표적인 장군이 오늘 이야기하는 홍범도와 김좌진 장군입니다.
김좌진 장군 – 역사(力士)로 대한광복회에 가담
그러면 김좌진 장군의 얘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김좌진은 김옥균의 양자라는 얘기가 있는데, 아마 김옥균이 죽은 다음에 문중에서 세운 것 아닌가 합니다. 1894년 김옥균은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저격을 당하였고 그 시체가 서울까지 끌려와서 만고의 역적으로 난도질을 당했습니다. 청일전쟁 직전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마 안동 김씨 홍성지역의 김옥균 일가 쪽에서 김좌진을 양자로 맞이한 것 아닐까 싶어요. 김두한의 책에 보면 김옥균이 김좌진의 백부라고 나와 있는데 그건 틀린 얘기입니다. 하여튼 김좌진은 1889년 11월 24일 홍성고도면에서 김형규의 둘째아들로 출생했습니다.
김좌진은 비호역사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홍범도는 기막히게 총을 잘 쏘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데 비해, 김좌진은 날 때부터 괴력을 가진, 그리고 몸이 대단히 날래서 비호라는 소문이 날 정도의 역사였어요. 네 살 때 다듬잇돌을 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은 과장이겠지요. 마을 사람들의 회고담에 의하면 열 살 때 김좌진 소년이 황소뿔을 쥐니까 황소가 맥을 못쓰고 뱅뱅 돌더래요. 그래서 그것을 꽉 내동댕이쳐버렸다느니, 김좌진은 통뼈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차력을 했다는 말도 있어요. 심지어 마을 사람들은 김좌진의 유모가 차력을 가르쳐줬다고 해요. (웃음)하여튼 김좌진은 어려서부터 어떻게나 힘이 좋은지 마을소년들이 꼼짝 못했다고 해요.
당시 마을 소년들은 어려서부터 죽어라고 일만 해야 하는데 김좌진은 양반집 아들이니까 서당을 다녔는데, 그는 서당에 다녀와서는 마을 소년들을 불러모아 자기 부하로 만들어가지고 병정놀이도 하거나 무슨 놀이를 했답니다. 그러면 다른 아이들은 일을 못하게 되어 집에 가면 혼쭐이 나기 때문에 김좌진이 서당에서 나올 시간쯤 되면 열심히 피해 다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또 어떤 할아버지는 “김좌진이 만주로 가게 된 것도 이유가 있다. 조선에서 장사가 나오면 어깨를 분질러버리는데, 김좌진도 어깨를 분질러 버릴 거라고 마을 사람들이 ‘너 도망가라, 도망가라’ 해서 일본인들이 어깨를 분지르기 전에 도망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맞지 않는
얘기지요. 왜냐하면 김좌진은 을사조약이 강제되기 직전인 16살 때 향리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되어 있고, 또 자강운동, 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거든요. 대한협회의 홍성지부도 맡았고 기호흥학회와 청년학우회에도 가담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어떻게 해서 여기에 가담하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청년학우회는 안창호가 윤치호를 내세워서 최남선 같은 사람들과 조직한 비정치적인 청년단체로서, 여기에는 기독교 신도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김좌진도 가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어 김좌진이 언제 대한광복회에 들어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개 1915년 아니면 1916년경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우국지심, 애국심이 어려서부터 매우 강하였고 그래서 일본 침략자를 미워했다고 합니다.
1910 년대는 암흑의 시기였습니다. 이때는 근대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민족 해방을 위한 활동상이 별로 없었어요. 의병들도 대체로 1909년 말이면 별로 싸우지를 못해서, 황해도 일대와 평안남도 일부에서 1915 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싸운 것이 자료에 약간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대한광복회가 남한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투쟁단체에 들어가는데, 거기에 김좌진이 가담했다는 것은 일찍부터 김좌진이 애국의혈남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