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기 애국계몽운동에 투신

원래 큰 제목이 무장투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단재는 무장투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역사학자이고 민족운동가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총을 들고 싸웠다든지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 대해서는 ‘무장투쟁론’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신채호는 1900년대 후반기에 전개된 민족운동의 두 가지 양상, 즉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던 분입니다. 대한매일신보』라든지 황성신문』에 관계했고 또 교육운동에도 관계했던 분입니다. 신민회에 관계해오다 이른바 ‘합방’이 되자 만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곳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광복회를 조직했고 청구신문과 권업신문을 내는 일도했지요. 1910 년대 신채호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당시에 신채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경으로 와 있었는데 아마 3.1운동이 신채호에게, 당시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굉장한 충격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애국계몽운동이라는 것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사상입니다. 우리가 실력을 양성해서 대동단결하자는 ‘대동론’이라고도 하고, 새로워지자 해서 ‘신민’이라고도 합니다. 날로 새로워지는 백성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실력을 양성했다가 기회를 기다리자는 것이지요. 이것을 기회론이라고도 얘기하는 사람이 이어요. 기회라는 것은 국제적인 정세에 의해서 제국주의 열강들간에 세력 싸움이 벌어질 때 그 기회를 잡아서 독립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강론적 계몽사상이라는 것은 대단히 부르주아적인 입장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1923년부터는 단재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가 됩니다. 물론 단재의 계몽사상이라는 것은 1900년대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서 1910 년대에도 계속 가지고 있었는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3.1운동 이후에는 자강론적 계몽사상이 민중 직접혁명론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채호의 후기 사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 후기 사상의 핵심을 이루게 해준 것이 무정부주의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1운동으로 사상적 방황

단재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사상적으로 방황을 하게 됐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자료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상적으로 걷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강론적 계몽사상이라는 것은 일반 인민들을 아주 정치적 의식이 없고 지능이 낮고 문화적인 수준이 낮은 상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잘 계몽시켜서 실력을 갖추게 한 다음 나중에 독립이 되면 그 실력을 써먹어야 한다는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3 ·1운동이 막상 일어났을 때는 비조직적이고 비계획적인 운동이었던 이 운동에서 이름없는 인민들의 힘이 굉장하다는 것이 나타났어요.

물론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중순까지 일어나는 것을 3·1운동이라고 하니까 후반기로 가면 조직적으로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만 처음에는 아주 비조직적이고 비계획적이고 자발적인 운동이었습니다. 7천 5백 명이 죽을 정도로 비계획적이었죠. 이건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보면 누구나 ‘민의 힘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구나, 이 사람들은 굉장한 역사적 동인이구나,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 커다란 역사의 바퀴를 구르게 하는 힘을 갖고 있구나’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단재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단재가 직접 고백한 것은 없지만 이 점이 바로 단재가 사상적 방황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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