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임시정부에 참여

그런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정부가 3개 생겼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정부가 7개 생깁니다. 대개 실체가 밝혀진 것은 5개이고 2개 정도는 전단(傳)정부라고 해서 종이를 가지고 ‘우리는 이런 정부를 만들었소’ 하고 퍼뜨리는 것이죠. 이런 정부까지 합치면 3 · 1운동 이후 7개의 정부가 생겼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3개로서, 하나는 상해임시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한성정부, 그리고 또 하나는 노령의 대한국민회입니다. 단재는 처음에 북경에서 상해로 건너가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됩니다. 상해임시정부를 어떻게 굴릴 것인가하는 데서부터 활동을 시작합니다.

1919년 4월 10일 첫 회의가 열리는데 29명이 모였습니다. 이것을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라고 하는데 의정원이라는 명칭도 이때 생긴 거예요. 조소앙 선생이 “의정원으로 합시다” 해가지고 의정원 조직이 만들어지는데, 그때 정부조직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통합된 상해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성정부도 있고 노령국민회도 있는 상황에서 상해측의 모임이 시작됐던 것이죠. 바로 이 회의에서 단재의 독립론, 그러니까 무장투쟁 독립론을 견지하는 단면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회의에서 행정부 수반으로 누구를 뽑을 것인가하는 추천이 나왔는데, 그 추천에서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안창호, 이동녕, 신채호, 박용만, 이회영, 김규식 등이 전부 추천됩니다. 그런데 그 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발언들이 세어지자 단재가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립니다. 이승만의 외교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거든요. 이승만의 외교론은 다음과 같은 국제정세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 12월부터 파리에서는 베르사이유조약이 열리는데, 그때 미국대통령이었던 윌슨이 거기에 가 있었단 말이죠. 윌슨은 1918년 1월 미국의회 연두교서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외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족자결주의라고 하니까 ‘야, 우리도 독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을 했던 거지요. 원래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연합국들의 패전국 식민지에 대한 정책이었습니다. 승전국의 이익이 관철되는 민족자결주의였죠. 그런데 일본도 역시 연합군이었으니, 누가 가도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외교적인 제스처에 불과했습니다.

주체적이고 무력적인 독립노선으로 전환

당시 미국 국무부와 윌슨 대통령간에 오간 문서들을 보면 “윌슨 대통령이 불란서에 가 있으니까 이승만이 가서 직접 독립을 얘기하려고 한다”고 하니까 윌슨이 비자를 내주지 않고 못 오게 합니다. 오면 골치아프죠, 조선을 독립시킬 입장이 아니었으니까요. 일본이 전승국인데 어떻게 조선을 독립시켜 주겠습니까? 이때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요구합니다. 미국이 우리나라를 독립시켜서 대신 통치해달라는 것이 위임통치안입니다. 단재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것은 바로 이점 때문이었습니다. 위임통치를 얘기하는 사람을 어떻게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뽑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이 단재의 무장독립투쟁 노선입니다. 외교에 의해서 독립하려는 것 이 아니라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독립노선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재는 여기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갑니다. 그래서 최소한 1919년 7월까지는상해임정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의정원회의에서는 9월에 들어 세 정부, 즉 대한노령국민회와 한성정부와 상해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한다고 결정이 납니다. 이때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정했는데 여기에 단재는 반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1920년 4월 북경으로 귀환했습니다. 귀환하기 전에 재미있는 일은, 단재는 임시정부를나와 상해에 머무르면서 신대한」이라는 신문을 만들어계속 상해임시정부를 공격했습니다. “이승만은 대통령감이 아니다. 이승만을 대통령 시켜서는 안된다. 위임통치하면 안된다”는 얘기였습니다. 단재는 위임통치가 아닌 무력노선을 추구할 것과 주체적인 노선을 주장했습니다. 이분사상에서 특징적인 것이죠. 누구와 타협하거나 기대는 것을 거부하는 겁니다. 소련에 기대는 것도 싫고 공산주의도싫고 미국에 기대는 것도 싫은 겁니다. 항상 민족(핵심은민중)의 주체적인 노선을 걷는 것이죠.

하여튼 신대한』을 만들어 임시정부와 노선경쟁을 벌이다가 결국 북경으로 귀환합니다. 당시 북경에는 단울단이라는 단체와 제2보합단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이 단체들은 전부 폭력단체로서 독립운동의 방략 내지는 장기적계획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수행하기보다 그때그때 닥치는대로 일본 고관이라든지 관리, 매국노들을 죽였던 단체입니다. 이 단체에 어느 정도 관계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관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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