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생의병장과 농민의병장

이런 의병투쟁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 상당부분은 유생의병장이었는데, 유생의병장이나 농민의병장들은 다 기본적으로는 나라가 멸망하고 왜놈에게 짓밟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애국심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전라도 유생들처럼 일제 때문에 더이상 생활하기가 어려워지고 계속 쪼들리게 되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지요. 말하자면 생활환경도 원인이 되고 일제 때문에 자유도 뺏기고 나라도 뺏기고 생활터전도 뺏긴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의병투쟁에 나서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은 그런 면 중에서도 더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서 의병투쟁에 나서게 됐던 것입니다. 포수 중에는 국가라는 것이 뭔지, 애국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몰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홍범도의 산포대의병대가 함경도 개마고원에 나타나게 되는 데는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단적으로 생활이라는 요인이 작용을 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완전 식민지화하기 위한 전 단계로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1905 년 11월에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발표를 했단 말예요. 실제로는 고종이 끝까지 사인을 하지 않았고 또 총칼로 위협한 것이기 때문에 그 조약은 무효 또는 불법조약입니다만, 하여튼 무력을 앞세워 통과시키고는 다음해에 통감부를 설치했습니다. 고종 자신은 사람이 그렇게 영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내 대에 와서 나라가 망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항거를 했지요. 그 항거 중의 하나가 이준, 이위종, 이상설 세 분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것이고, 또 미국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었지만 헐버트를 통해서 미국에게 도와달라고 하소연을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결국 헤이그 특사파견을 구실 삼을 일제에게 고종은 내쫓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도 고종은 끝까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07년 고종이 양위한 것처럼 강제로 만들어서 순종을 내세우고, 거의 완전히 식민화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정미7조약이고 군대해산입니다.

한국인 군대 자체는 숫자가 얼마 안됩니다만, 그 얼마 안되는 군대조차도 일본인들은 그냥 놔둘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이 부분도 여러분은 상당히 중시해야 합니다. 인도차이나건 아프리카건 어느 경우건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통치할 때 식민지 토민군, 식민지 지방군대라는 것을 두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1907 년 이래로 한번도 한국인으로 군대를 편성하지 않았어요. 군대를 해산시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인 부대를 편성하면 장에는 친일적인 군대일지 모르지만 불만을 가지게 되면서 언제 민족적인 성향으로 돌아서서 일본군과 싸울지르거든요. 다른 지역과 달리 한국인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서 민족의식이 은연중에 뿌리가 깊다고 일본인들도 간파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세계 식민지에서 그 나라 지역으로 되어 있는 부대가 없는 나라도 우리나라 하나뿐일 것 같은데, 그렇게 한국인 부대를 편성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국인 자체를 병사로 뽑지도 않았어요. 장교만은 워낙 친일파 거두, 처음에는 구한국 군인과 귀족들을 흡수하면서 일부를 장교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친일파를 양성하기 위해서 1930년대 후반에 민족의식이 박약하고 출세욕이 강하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자들 중 일부를 장교로 뽑았어요. 사병은 1939년에 가서야 소위 지원병이라는 형태를 뽑는데 그때는 중국전선이 워낙 길어지니까 일본병력이 부족한 것을 메울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아주 소수만을 뽑았습니다. 일본인 못지않게 충성을 보이겠다고 지원을 했는데도 그 중의 일부만 뽑았던 거예요. 그러다가 1943, 44년에 가서야 도저히 일본군인만 가지고는 전선을 막을 수가 없으니까 한국인도 군대로 끌고갔어요. 그 숫자가 20여만 명 가량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일본인은 한국인 군대를 두려워했고 그래서 1907년 얼마 안되는 군대를 해산한 것입니다. 원래 배가 고파서 군대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으니까 먹을 것만 제대로 준다 해도 처음에는 일본에 충성을 바쳤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그것을 다 해산시키니까 군대가 바로 서울에서부터 의병투쟁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나라를 뺏겼다는 울분도 작용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그다음에는 원주 등 각 지역의 군대가 의병투쟁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은 이렇게 군대를 해산시켜놓고 한국인에게 총포나 화약을 갖지 못하게 하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1907년 9월에 공포했어요. 한국인은 도검도 팔뚝 길이 이상 되는 것은 갖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신파극에는 육혈포강도사건이 나오기도 하지만, 한국인은 조선시대에는 조선시대대로 칼을 다루기가 어려웠고, 일제 때는 이렇게 해서 무기를 소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1907년부터 1945년까지 국내에서 무장투쟁이 거의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은 국경에서 총이 반입되기 전에는 총이 없었고 총을 다루는 데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미국영화를 보면 총으로 싸우고 하잖아요. 유럽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일제가 완전히 무장해제를 시킨 거예요. 그것을 미군정에 와서도 그대로 따랐어요. 그다음에는 대한민국정부가 그대로 이어받아서 1년에 한두 번씩 꼭 총포류 및 화약을 신고하라는 것이 나오잖아요. 민중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지하투쟁을 빼놓고는 국내에서의 무장투쟁은 많지 않았습니다. 홍범도의 포수부대들이 잘 싸운 것은 바로 이 점과 직접 관련이 됩니다.

함경도, 그 중에서도 개마고원에 사는 사람들은 농사만 지어서는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농사도 많은 경우 화전을 일궈야 하는데, 이 때문에 일제 때는 화전민투쟁도 있었지요. 하여튼 포수생활을 겸업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늦가을과 겨울에는 주로 사냥을 했고 다른 계절에는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와 같이 화전과 짐승 잡는 것을 겸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는데, 일제가 ‘화약과 총을 내놔라. 전부 신고하라’고 하니까 감출 수밖에 없겠지요. 이때가 1907년 10월경입니다. 홍범도는 동료 포수들에게 총기와 탄약을 일본군에 납부하는 것을 거부하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설득으로 안산 · 안평의 포연대원들은 의병투쟁에 나서게 되었고, 여기에 다른 화전민과 광산노동자, 빈농들도 가담하고, 북청진위대의 해산으로 실직상태였던 해산병도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홍범도부대입니다. 홍범도와 차도선 휘하의 70명쯤 되는 의병들은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에서 집결하여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대는 싸움을 기가 막히게 잘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유생의병장들은 대개 싸움을 잘하지 못했거든요. 평소에 노새나 당나귀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말도 잘 못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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