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이범석의 활동

1946년 귀국 이후 이범석은 국가와 민족만이 유일하다는 국가지상, 민족지상을 내세워 민족청년단의 표어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그때부터 파시스트 또는 히틀러유겐트 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족청은 미군정에서 키워줬어요. 자금도 대주고 옷도 대주고 먹을 것도 줘가면서 키웠는데, 미군정은 장기적으로 한국을 통제할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서 극우군인 이범석이 귀국하니까 족청을 키워준 것 같습니다. 족청은 지금까지도 힘이 남아있어서 족청계 강모 등이 고위층에서 활동하고 있고, 1950, 1960년대에도 족청계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종종 있었어요.

이범석은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이 되기까지 족청을 이끈 것을 빼놓고는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청년단체처럼 테러활동을 하는 것은 보이지 않아요. 정부가 수립될 때 이승만의 분열통치정책에 의해서 한민당의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지 못하고 이윤영이 퇴짜맞다가 이범석을 지명하니까, 한민당 쪽에서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고 무소속 쪽에서도 일부가 동의를 해줘서 초대 국무총리가 됐죠. 그리고 이승만이 초대 국방부장관에도 앉혀놨어요. 그런데 이범석이 국방부장관이 됐을 때는 미국 쪽에서 이범석을 꺼렸던 것 같습니다. 이범석이 정훈부대 또는 특별부대를 편성하려고 시도했는데 미군 쪽에서는 나치와 같은 특수한 사상부대는 문제가 있고, 또 특별부대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해서 반대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범석은 반민법이 만들어졌을 때 그 당시 정부 쪽 사람들이 대개 그랬듯이 반민법의 시행을 반대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이범석처럼 민족을 주장한 사람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초대 문교부장관으로 족청의 이데올로그인 안호상과 함께 일민주의를 제일 고창했지요. 이승만 정권이 처음에 부르짖은 것이 이 일민주의였습니다. 국민당도 처음에는 일민주의를 내걸었으니까 극우세력의 사상은 일민주의라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민족을 많이 외친 자였으니까 친일파 숙청을 열렬히 주장해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특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범석의 ‘민족지상’이나 ‘일민주의’는 기만적인 것으로, 사실은 민족주체성이 배제된 파시즘입니다. 이것이 한국형 파시즘의 특징이지요. 그 후 이범석의 세력이 커질 것 같으니까 이승만은 먼저 국방부장관직에서 내쫓은 후 국무총리도 해임하여 대만에 중국대사로 보냈습니다. 그 뒤 이범석이 귀국하고 얼마 안있어 이승만의 장기집권욕 때문에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국무총리에 장택상을 앉히고 이범석은 내무부장관을 시켰어요. 1952년 5월 25일인가 내무부장관을 시켰는데, 이승만은 국회의원을 때려잡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데 가장 잘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임명한 것이겠지요.

이범석은 내무부장관에 취임한 다음날에 부산 일원과 경산도 산악지대에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인 이종찬을 앉히려고 했지만 이종찬이 대구의 사령부에서 “나는 그런 데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 우리 군인이 지금 한창 싸우고 있는 판에 어떻게 정치에 이용할 수 있단 말이냐?” 해서 그 유명한 이종찬의 거부가 있었고, 그래서 이종찬은 참모총장에서 물러나고 헌병사령관인 원용덕이 계엄사령관이 되었던 겁니다.

그다음에 국회를 포위해 국회의원들은 헌병들이 끌고가고・・・. 그 당시는 국회의원들이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했는데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통째로 끌어올려가지고 끌고가버렸어요. 그리고는 헌병대에 구치시켜서 강압을 하게 되지요. 또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으로 영구집권을 하고싶어서 그것을 추진할 당을 하나 만들려고 했는데, 그때 이범석이 또 앞장 서서 자유당을 만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족청계가 자유당을 좌우지하다시피 했죠.

1952년 8월인가 대통령선거가 있었을 때 자유당에서는 대천대회에서 총재인 이승만을 대통령후보, 부통령후에는 이범석을 내세웠어요. 그런데 장택상이 보니까 이승만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는 자유당 후보가 아닙니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저것은 뭔가 좀 이상하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당의 후보가 아니라니, (웃음) 그래서 장택상이 이승만에게 “부통령은 누가 적당할까요” 하고 물어봤더니 아무 말 안하다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좋을 것 같기도 한데…”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함태영이었는데, 함태영은 당시 국민의 99%가 잘 몰랐습니다. 이승만은 고분고분한 노인네를 부통령으로 찍은 것이지요. 그때부터 장택상이 김태선 내무부장관과 함께 선거운동을 한거예요. 그때는 전쟁이 치열하니까 엉터리 선거였습니다. 제대로 투표나 했는지 몰라요. 하여튼 전라남도에서는 이범석의 표가 6만 표인가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경찰이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이지요. 사람들이 이범석은 알아도 함태영은 모르는데 뚜껑을 열어보니까 자유당후보 이범석보다 함태영의 표가 더 많이 나왔습니다. 이범석이 낙선하자 장택상과 김태선을 고발했어요. 그리고는 고시진사건을 일으켜 “장택상은 일제와 내통했다” 해서 족청계가 공격을 퍼부었죠. 그런데 이승만이 역시 능란한 자입니다. “그래? 장택상이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사람 못 믿겠구만 해서 장택상을 단칼에 내쫓아버렸어요. 이용할 만큼 이용해먹었다는 것이겠지요. 왜냐하면 장택상이 그 유명한 발췌개헌을 통과시킨 사람 아닙니까? 그리고나서 이승만은 이범석을 치기 시작한 거예요. 거의 1년간에 걸쳐서 피투성이 싸움이 자유당에서 벌어집니다. 청계 대 반족청계의 싸움, 이것은 자유당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회에서도 벌어졌고 대한노총에서도 벌어지는 등 큰 단체에서는 계속 양쪽이 싸웠어요. 결국은 이승만이 족청을 싹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이범석은 죽을 때까지 큰 힘을 못 폈습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 때 유명한 YTP(靑史)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학생들은 정보부에서 고용하여 학생 내부에 프락치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 YTP의 전신과 관련있는 것이 이범석이 만든 일종의 극우청년단체였습니다. 이때도 이 극우청년단체가 나치의 유겐트를 본 따려고 했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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