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통일주비회 결성과 국민대표회의 개최

1921년에는 군사통일주비회를 만듭니다. 당시 군사통일주비회를 만들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려면 상당히 긴데, 간단히 말씀드리면 1920년에 유명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있게 됩니다. 아 청산리전투를 겪고 나자 일본은 만주지역을 쓸어버립니다. 이를 경술참변이라고 하죠. 당시 만주에는 대한독군부, 대한독립군, 보합단 등 무장투쟁세력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는데 일본이 무자비하게 공격해들어오니까 그 단체들이 모두 쫓겨갑니다. 일본은 사람을 있는 대로 다 죽여버렸어요. 요즘 중국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당시 경술참변으로 죽은 조선사람이 5천 명이라고 나와 있어요. 약간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그 비참함의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조선인이라고 하면 다 죽여버리고 불태우고 싹 쓸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무장독립군 부대들은 북만주로 쫓겨가 흑룡강이 흐르는 북만주 끝에 밀산이라는 곳에서 36개 단체의 군대가 집결합니다.

다시 우리 얘기와 관련해서 돌아오면, 이 과정에서 무장운동단체들이 따로따로 흩어져 있으니 이것들을 모아야겠다는 뜻에서 바로 군사통일주비회라는 단체를 만들게 됩니다. 이 단체를 만드는 데 단재는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당시에는 단재 이외에도 단재와 북경을 근거지로 한 전투적인 민족운동가들이 있었는데 신채호에 동조했던 박용만(이승만과 끊임없이 대결했고 미국에서 네브라스카소년병학교라는 최초의 무장학교를 만든 사람), 신숙, 원세훈 이런 사람들이 함께 군사통일주비회를 만들게 됩니다. 그 군사통일주비회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군사통일촉성회가 있었는데 하여튼 이 사람들이 주도가 되어 1921년 2월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자는 문건을 발표합니다.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하면서 내놓은 문건이 우리 동포에 고함입니다. 이것은 1921년 2월에 나온 것으로 박은식, 김창숙(성균관대 초대 총장), 유혜규, 왕산, 원세훈 등 13인 명의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위해서 발표된 것입니다. 국민대표회의라는 것은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정부로서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현재의 임시정부로는 되지 않으니까 국민대표들이 모여서 정부를 다시 만들든지 고치든지 정부 형태를 논의하기 위해서 모이자는 겁니다. 여기서 단재는 위엄통치안 성토문도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1923년 1월 30일부터 7월 사이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 국내의 13도 대표가 포함된 70여 독립운동단체 대표 124명이 모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데 임시정부를 놔두고 이런 대회가 열렸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임시정부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대한국민대표회의가 끝나고 나서부터는 국민적인 여망과 달리 임시정부가 실질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했어요. 아니 기능보다는 민족적인 귀속감 같은 것들을 임시정부가 수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표회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단재 신체호의 무장독립론이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단재의 무장독립론은 이승만의 외교론을 반대할 때부터 드러났습니다. 단재는 이승만이 국무총리가 됐을 때도 반대했고 임시정부가 생겼을 때 대통령으로 추대되는 것에도 반대해서 결별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단재는 주체적인 무장독립 노선을 견지하려는 면이 보였는데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국민대표대회에 드는 비용은 전부 코먼테른이라는 국제공산당에서 나왔습니다. 국제공산당에서 20만 루블을 받았는데, 그 돈을 상해로 가지고 온 사람은 한형권(韓馨權)이라는 사람이에요. 이 국민대표회의가 열리는 데도 비용이 들겠지요. 8도에서 온 사람들에게 여비도 줘야지 숙소도 정해야지 유인물 만들어야지 회의비용 들여야지, 그외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돈들 데가 많았겠지요.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