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

이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창조파는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워서는 외교밖에 안된다. 정부를 노령이나 북만주로 옮겨서 우리 민족이 사는데서 독립운동을 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직접적으로 나온 자료는 없습니다만, 이것은 말하자면 무장투쟁 독립노선이지요. 거기에 반해서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상해에 그냥 두되 이것을 개조하자는 입장입니다. 개조파 사람들은 대개 여운형, 안창호 등인데, 안창호는 초기 그러니까 세 정부가 통합해서 9월에 출발하기 전 3월부터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습니다. 그다음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때 여운형은 신한청년단이라는 조직을 갖고 있었어요. 이 단체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여운행은 이 신한청년단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는데 신한청년단 사람들은 상해임시정부가 서고 난 이후에는 대개 차관급인 차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상해교민회도 여운형 세력으로서 이런 조직도 개조파였죠. 또 국민대표회의의 의장을 했던 김동삼은 경북 안동사람으로, 이상룡 · 유인식 같은 사람들과 함께 안동지방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건너와서 독립운동을 했던 상당히 전투적인 사람이었죠. 그는 신흥무관학교에도 교관으로 간여했던 아주 인격자였어요.이런 사람들도 다 개조파인데 이 사람들은 대개 남만주에서 왔습니다.

창조파는 북경군사통일위원회의 신채호 같은 사람들,또 상해임정의 김규식 박사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 그리고조직적인 참여는 아니지만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여러 인물들이 여기에 듭니다. 창조파는 정부를 노령이나 만주에다시 세워 우리의 주체적인 힘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회가 1월 30일부터 열렸다고 했지만실질적으로는 4월 1일부터입니다. 그날그날의 대회일지가 전부 남아 있어서 상세히 알 수 있는데 매일 싸움만 했습니다. 독립운동 방략이 다르고 이니셔티브 문제가 달려있었으니 싸울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회의는 4월 1일부터 시작되어서 5월 30일이면 끝이 납니다. 개조파들이 더이상 참여를 안하지요. 김동삼 같은 경우는 서간도로 돌아가버려 다 깨져버립니다. 창조파에서는 윤해라는 사람을 외장으로 다시뽑아서 창조파들만 국민대표회의를 진행했지만 7월에 가서는 아무 소득없이 끝나버립니다. 결국 임시정부는 그대로 있게 되었고요. 그렇게 아무 소득없이 끝나자 신채호는다시 북경으로 돌아옵니다. 여기까지가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단재가 참여해서 활동한 사항입니다. 여기에서도 드러나듯이 단재의 독립노선이란 전투적이고 주체적입니다.

아나키스트로 변화하는 과정

이제부터 단재가 사상적으로 아나키스트로 돌아서는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단재는 3·1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사상적으로 흔들렸다고 얘기했는데, 1920년에서 1922년 말 사이에 우리나라 아나키스트의 원조격인 사람으로 이회영이 있습니다. 그외에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백정기 이런 사람들을 무정부주의 계열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사람은 이석정이라는 사람인데, 당시 이석정은 북경대학 교수로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 교수였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단재가 아나키스트로 변하게 된 데는 이석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중국에는 신채호학사라는 출판사가 생겨요. 신채호학사는 신채호의 글을 영역과 한역으로 펴내려는 계획을 갖게 되는데 거기에 관계하는 면면을 보면 유자명도 있고 이석정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석정과 관계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또 단재전집을 보면 단재가 절에 숨어 있던 적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이때도 이석정이 절에다 소개를 해준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또 이석정의 소개를 받아서 사고전서와 불교의 무슨 서적을 읽었다는 것도 나와요. 그 뒤로는 두 분 관계가 안 나오는데 아마 그때까지도 단재와 계속 교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단재가 1936년에 옥사를 했는데 해방 후에 신채호박사를 만들어서 신채호를 추모했던 것이 아니냐 생각되는 것이죠. 이 이석정이라는 사람은 당시 중국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1920년대 초반 중국의 사상계를 보면 진덕수, 이대교를 중심으로 하는 맑스주의가 있습니다. 다음에는 이석정의 무정부주의계열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호적의 실천학파라는 사상조류가 있는데, 이것은 프래그머티즘이라고 해서 존 듀어의 실천교육학으로 알려진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을 받은 호적류의 실천학파들이죠. 또 하나는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같은 것이 있었어요. 이렇게1920 년대 초반의 중국을 보면 크게 네 가지의 사상적 조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재는 이석정을 매개로 해서 무정부주의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을 가지고 인민들을 어떻게 교화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3·1운동이 일어나고 보니까 인민들이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굉장히 잘못 생각했구나, 이것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그러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게 기대볼까 했는데 막상 보니까 창조파와 개조파에서도 드러나듯이 두 파가 싸움을 한단 말이에요. 여기에 실망을 느낀 거지요. 그래서민족주의도 버리고 이전의 사상들 사이에서 방황을 하다가 이석정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정부주의자들, 말하자면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무정부주의에 대해서 듣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결정적으로 신채호를 무정부주의자로 변하게 한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1923년 1월에 의열단에서 나온『조선혁명선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래 단재에 대한연구들은 그가 바로 이 조선혁명선언서를 씀으로 해서완전한 무정부주의적 사상구조를 세우게 됐다고 얘기하고있습니다. 의열단에서 단재에게 “우리 행동강령을 하나 적어주시오” 하고 부탁합니다. 의열단의 수령은 누구입니까?바로 약산 김원봉입니다. 의열단은 1919년에 만들어졌는데 이 단체는 폭력투쟁을 지향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종로경찰서의 경찰들을 여럿 죽이고 죽은 쌍권총김상옥 의사도 의열단 소속입니다. 그리고 강의규도 의열단 소속이고, 황포강에서 다나카(田中) 대장을 사격하기도한 오성균도 의열단이었습지다. 또 김시현이라는 사람도 그렇고, 김익상은 총독부 건물을 파괴하려다가 잡혔죠. 김시진, 유석현도 있는데 유석현이라는 사람은 제6공화국 시절 민자당 고문을 한 사람입니다. 김시현 같은 사람도 정치를 하다가 돌아가셨죠.

이런 일이 있던 것이 의일단입니다. 이렇게 폭력투쟁을 지향하던 김원봉이 “우리는 대중성을 갖추지 못했다. 일회적으로 폭탄만 던져서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알리지도 못하니 우리에게도 행동강령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운동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어야 하고 신념도 표명할 수 있는 행동강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1922년 11월에 김원봉이 단재를 만나서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단재가 상해로 와 여관에 면서 한 달 반동안 쓴 것이 조선혁명선언입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이 선언서에서 무정부주의 사상, 아나키즘이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단재의 아나키즘에 영향을 준 사람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고, 자기가 책을 읽어서 안 사람들은 유사복)이라든지 교토쿠슈스이같은 사람인데 이 사람은 1911 년에 잡혀서 죽죠. 그리고 바쿠닌, 프루동, 크로포트킨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 크로포트킨입니다. 단재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어요. “젊은이들이여, 크로포트킨을 본받자 그를 본받아야만 우리가 살 길이다”라고 여러 차례 쓰고 있습니다. 크로포트킨은 바로 민중혁명론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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