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 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63년 입니다. 1863년에 13가구가 처음으로 신한촌을 이루게 되는데 망명 후 이동휘의 주요 활동무대가 된 곳도 이곳입니다.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하면서 이상설이 주도했던 노령지역 조선인들의 일종의 정치사회단체였던 권업회 사업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1914년 러시아는 노령지역에서의 모든 조선인들의 운동을 금지했습니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거든요. 그러다가 이 금지가 풀린 것은 1917년 2월혁명이 일어나고부터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917년 6월 4일에 니콜리스크라는 곳에서 전로한족대표자회의가 열립니다. 이 전로한족대표자회의의 신문이「청구신문』이고 한때 단재 신채호가 편집주간을 했는데바로 이 회의가 한인들이 모임을 가질 수 있었던 첫 회의였습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대체로 두 부류있습니다. 하나는 귀화인들로 이들은 대개 일단의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 부르주아 계층입니다. 최재형, 문창범, 백도제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전에 귀화를 했는데귀화를 해야만 공무원, 군인이 될 수 있었고, 교육문제, 토지배급 문제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귀화인들에게는 극동지역에서 이르쿠츠크 등 내지로 거주지를 옮겨주는 정책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 귀화인들은 땅도넓게 가지고 있고 교육도 받고 일찍이 부를 축적한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비귀화인들과 망명자들(이동휘 같은)로,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사람들이 이 전로한족대표자회의에서 모였던 겁니다. 여기에서 귀화인들이 우월권을 잡은 거지요. 그런데 귀화인들은 볼셰비키를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볼셰비키를 찬성하는 비귀화인들과 망명자들 사이에서는 여기에대해 반감이 생겨나고 이들끼리 모여 1917년 하반기에 만든 것이 아령한인회입니다. 이 아령한인회의 지역적 기반은 대개 하바로프스크였고 전로한족대표자회의의 기반은니콜리스크입니다. 이 두 지역은 지도상으로 얼마 떨어져있지 않지만 상당한 거리였던 모양입니다.
아령한인회 사람들은 대개 비귀화인들 혹은 전투적인볼셰비키를 찬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러시아정교 신부인 오와실리가 있고 또한 군인인 유스테판이라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이반, 김립, 최성호, 이한영, 전태국 등 1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아령한인회는 1918 년에 전로한족대표자회의의 기관인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와 통합합니다. 이 통합이 성사되는 데는 극동인민위원회 의장인 크라스노쇼코프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데, 그는 나중에 극동인민공화국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통합 후인 1918년 4월, 크라스노쇼코프의 주도 아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혁명가대회가 열렸는데 이후에 하나 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합니다. 이동휘, 양기탁(신민회의 총감독), 유동렬, 이동녕, 김립(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할 때 국무원 비서장을 하던 인물), 박에, 이한영, 임호, 전일, 알렉산드라 페드로브나 김이었는데 마지막에 거명한 사람은 여자입니다. 이 여자가 한인공산주의자 중에서 가장 먼저 볼셰비키 고위층을 차지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내륙지방의 벌목채취장에서 일을 하다가 볼셰비키에 가담해서 이때는 극동인민위원회 외교부장을 했는데, 이쪽 지역의 한일들을 묶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사람이지요. 또 유스테판, 오와실리, 이인섭, 오하묵 등이 있었는데 오하묵 같은 사람은 나중에 이르쿠츠크파로서 이동휘 세력과 대립하는 핵심적 인물이었지만 이때는 같이 했습니다.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의 생성과 소멸
그런데 이 한인혁명가대회가 분열됩니다. 역시 두 파로 갈리는데 볼셰비키와 너무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주체성을 가지고 볼셰비키와는 사안에 따라서 협조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는 우파와 ‘볼셰비키로 나가는 것만이민족운동을 효과있게 수행해나가는 길이다’라는 좌파로 갈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파들은 나가버리고 좌파들이 1918년 5월 10일(러시아력으로는 4월 18일, 이 날짜는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왔다갔다 했는데 지금은 4월 18일로 확정된 것 같습니다). 볼셰비키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게 됩니다.
한인사회당 창립에 참여한 사람들이 약 30여 명으로 이한인사회당이 국내외를 통틀어 조선인들이 만든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입니다. 이전에도 신규식이 만든 사회당이 하나 있었지만 이것은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5월 10일이라는 시기가 중요합니다. 이때까지 전로한인중앙총회는 아직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었어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도 그럴것이 이때는 레닌이 성공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낙관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깐요.
당시 제정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중 연합군으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17 년 10월혁명을 일으킨 후 레닌은 같은 연합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등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그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부르주아정권을 타도할 것을 촉구하게 됩니다. 동시에 제정러시아가 그 나라들에 지고 있었던 채무관계에 대해 무효를 선언해버립니다. 즉 그 채무는 러시아 왕정이 진 것이므로 혁명정부로서는 갚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종래로 연합국과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적대관계가 된 종래의 연합국도 문제지만 독일 또한 혁명정부에 문제가 안될 수 없었어요. 독일과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할 경우 취약한 혁명정권은 막을 방도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독소조약을 맺습니다. 거기에다짜르 봉건정부를 지지하는 백군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레닌의 혁명정권이 조선언 이민들이 살고 있는 극동 시베리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것은 1922년 말에 가서야 가능했습니다.
이렇듯 연합국, 독일과의 관계와 백군 때문에 볼셰비키 세력은 아주 힘들었어요. 거기에다 1918년 7월인가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이 극동지역으로 들어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게 되고 당연히 백군을 지원하게 되었죠. 이에 1918년 백위파정권을 극동지역에서 볼셰비키세력을 압도하고 콜차크정부를 수립합니다. 이런 와중에서 볼셰비키 세력과 백위파세력은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으니, 볼셰비키가 성공한다고 확신을 못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이때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것이지요.
한인사회당을 만든 한 달 후인 1918년 6월 13일부터 24일에 걸쳐서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대회가 열립니다. 전로한족중앙총회의 대표자대회입니다. 당연히 한인사회당이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투표에서 져버렸습니다. 여기서 한인사회당은 굉장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또 체코군이 봉기를 했습니다.
이들은 원래는 연합국이었던 러시아의 포로들이었는데, 조국인 체코나 독일 등에 반대하여 러시아, 영국 등의 연합국세력에 합류할 것을 선언해버린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러시아 10월혁명 후 레닌의 볼셰비키정부가 반연합국 선언을 하고 독소조약을 맺게 되자 러시아 내에 주둔하던 그 체코군들이 봉기한 것입니다. 이들은 숫자도 숫자이려니와 굉장한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극동지역을 휩쓸며 백군을 옹호하고 볼셰비키와 싸우게 된 것입니다. 체코군의 봉기는 열강의 극동 침입을 유도하는 구실이 됩니다. 연합군들이 ‘체쿠군을 구하겠다’고나선 거지요. 일본 함대가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륙하게 되고 미국도 통신병을 보냅니다.
이러한 상황은 백위파를 크게 고무하여 1918 년 후반기극동지역에는 백위파정권인 참차크정부가 수립되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자연히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한인사회당 조직들이 무너져버립니다. 이때 알렉산드라 페드로브나 김도 죽습니다. 그리고크라스노쇼코프가 대통령으로 있던 극동인민공화국도 전부 위쪽으로 옮겨갑니다. 이때 이동휘는 황급히 만주지역으로 피하였고, 이동휘와 연대하고 있던 유동렬부대가 약100여 명 되었는데 조선인 적위대로서 우수리전투에 참전하여 백위파들과 싸웁니다. 이것이 무장투쟁입니다.
1918년 이동휘는 일본군과 백위파를 피해 만주로 갔다고 했습니다만, 그 후부터 1922년 말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볼셰비키 군대의 일원으로 혹은 빨치산으로서 참가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투에 이동휘가 직접 참여한 사실은 나타나지 않지만 앞서 말씀드린 유동렬부대처럼 한인사회당이나 이동휘는 그 조선인 전사들에게큰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