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으로 공산주의에 반대

지금까지는 단재의 민족주의운동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그렇다면 공산주의자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는가를 보면, 여기에 대해서는 아주 반대합니다.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사대주의라는 거죠. 단재가 공산주의에 반대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공부하면서 느끼기로는 1921년 6월에 일어났던 자유시 참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유시 참변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면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이긴 후 경술참변으로 무장단체들이 북만주로 쭉 몰려올라가서 밀산에 36개의 부대가 모였습니다. 36개의 부대는 다 제각각이었는데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이라는 하나의 부대로 됩니다. 여기에 이청천 장군도 있고 홍범도도 있고 서일, 박일리아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자유시로 넘어갑니다. 자유시란 스바보드느이라고 하바로프스크에서 조금더 들어가는 곳인데 바로 여기에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서 군권투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적군과 코민테른에서는 이르쿠츠크파의 편을 들어주고 6월 26일 적군과 이르쿠츠크파들은 상해파의 박일리아부대를 무장해제시키게 됩니다. 총은 곧 목숨인데 무장해제를 당하려고 하겠어요? 그러다보니 서로 총질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 죽은 사람이 4백 명에서 1천 명 사이라고 하는데 자료마다 달라서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입니다. 결국 민족상잔이지요. 노선의 차이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전략의 차이 때문에 민족에 대한 살상까지도 가능한 것에 대해 통탄스러움과 비분 같은 것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때 참여했던 사람 중에 이청천과 김홍일 장군이 있는데 나중에 증언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자유시 참변 후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홍범도는 소련에서 못 나오는데 인품이나 여러가지 면으로 봐서 민중적인 빨치산, 위대한 사람으로 불리죠. 이청천은 다시 넘어오지요. 그래서 만주지역에서 군사통합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1920년대 중반에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재편되는 것입니다. 대개 이 부대들이 넘어와서 기조의 세력들과 합류하는 방식이었어요.

단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소련에 붙으려고 한다”고 비판했는데, 바로 이 자유시 참변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코민테른에서 상해로 40만 루블이라는 자금이 들어오는데 그 자금을 성인 약 50명의 몸무게로 해당하는 금덩어리로 받게 됩니다. 이것이 들어오자 또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에 대한 회의 때문에 단재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반대했을 거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무장투쟁 노선 견지한 이동휘

다음은 이동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주지역이나 상해지역의 민족운동에서 가장 대중적이었던 사람들은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여운형 등이었습니다. 단재는 여운형도 미워했습니다. 아까 신대한」이라는 신문을 냈다고 했는데 거기에서 여운형이 일본에 가서 연설한 내용을 가지고 타협적이라고 비판했거든요. 요즘 학생들은 이승만, 김구는 알면서 김원봉을 모르고 심지어 이동휘를 모르고 있어요. 이동휘는 구한국의 군인입니다. 참령이니까 지금의 대령 정도 됐는데 강화수비대에 있다가 망명합니다.

1907년에 애국계몽운동에서 비밀조직으로 결사되는 것이 신민회인데 양기탁, 이동휘, 이동녕, 김구, 안창호, 이승훈 등이 여기에 가담했어요. 신민회의 준비론, 실력양성론에 의해서 해외독립군기지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동휘도 넘어갔습니다. 이때의 망명자들이 모여 이른바 청도회의라는 것을 여는데 이후 넘어간 사람들은 노선의 차이에 따라 자꾸 갈립니다. 그때 이동휘는 서간도에 있지 않고 노령 쪽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은 서간도에 남은 사람들과 다른 독립운동 방략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민이나 망명해온 조선인들을 상대로 신문을 낸다거나 계몽활동을 펴서 그들을 조직화하고 세력을 확대해서 싸우자는 주장에 반하여 이동휘는 지금 당장 싸우자는 무장투쟁 노선이었습니다. 넘어온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들을 통해 지금부터 큰 단위든 작은 단위든 모여서 일제를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무관학교가 세 개 생먼저 1911 년에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됩니다. 처음겼는데 신흥강습소로 시작해서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변해간 거죠. 무관학교라고 하면 중국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니까 숨겼던 겁니다. 그러다가 1913년에 정식으로 무관학교가 되고 이후 두 개가 더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동림무관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밀산무관학교입니다. 밀산은 북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서간도에서는 굉장히 먼 곳입니다. 이동휘는 그 밀산무관학교의 교장이었습니다.

최근까지 학계에서는 이동휘가 무장독립 노선을 걸었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지로 이동휘가 그 노선에 따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사실에 대한 구체적 실증적 연구는 없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한국독립운동사의 재조명”이라는 학술단체 토론회에서, 박보리스라는 러시아 이르쿠츠크 국립사범대 교수가 발표한 글을 읽어보니까 러시아 자료를 인용해서 썼는데, 1911년부터 1913 년 사이에 이동휘가 1,500명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국내의 의병장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함경북도 무산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물론 당시 북만주나 노령에 1,500명의 군대가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1911년 만해도 러시아 · 중국의 일본과의 외교적인 관계가 적대적으로 바뀌지 않은 상태인데 1,500명의 대부대가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무산을 공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자료에 이러한 사실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나 횟수에는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국내 의병세력들과의 연합전선 형성이나 국내진입작전 등의 사실 여부는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러시아 자료에 비해 다소 소략하긴 하지만 일제측 자료에 의해서도 이동휘의 국내 의병세력과의 연합작전이나 국내진입작전 감행 사실은 확인되고 있습니다. 즉 1911년 황해도 이진산이라는 사람이 만주지역의 이동휘 같은 의병장들과 연합전선을 벌이기 위해 황해도에서 거기까지 와서 회의를 갖거든요. 그리고 그 회의에서의 논의에 따라 무산지역에 대한 공격이 있게 됩니다. 피해는 많이 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이런 것이 최근의 연구성과로 밝혀져 있다는 점을 우선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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