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영향으로 재창당되는 한인사회당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운동 역시 이지역에 굉장한 충격을 주었어요. 3.1운동 이후인 1919년 4월 말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사회당대표자대회라는 것이 열립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재창당이 됩니다.이 대회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인사회당 당원이 1만 명 이나 된 것입니다. 1918년 6월에서 1919년 사이에, 그러니까 1년이 채 못 되어서 볼셰비키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하부구조를 갖추게 된 거죠. 그리고 한인사회당에 신민당이 합해지는데, 신민당은 2만당원을 가지고 있던 굉장히 큰 조직으로서 김규면이라는 사람이 단장이고 감리계 계통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단체입니다. 비밀단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통합이 있고 난 후의 조직형태가 재미있는데 신민당 조직이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한인사회당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인사회당에 따르지 않고 신민당을 그대로 유지하는 거예요. 이것은 한인사회당의 대중화 활동에 도움이 되기 위한 전략전인 조치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되는데, 신민당의 입장에서 보면 한인사회당은 이때 창당된 것이고 한인사회당의 입장에서 보면 재창당이 되는 것이죠.

자료를 보면, 김규면이 소부대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한 것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계릴라 부대들 중에서 홍범도 장군이 가장 먼저 국내 진격작전을 갖고, 또 여러 소부대들이 진격작전을 하는데 김규면부대도 그런 부대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장투쟁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의 한인사회당의 재창당은 볼셰비키의 후원 없이 성립됐고,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민족해방운동세력의 주체적인 역량이 성숙됐다는 징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동휘 임정 국무총리로 부임하다

이동휘는 1919년 9월 18일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부임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무장투쟁과 크게 관계되지 않는 내용입니다만, 이동휘와 민족운동의 관계를 볼 때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먼저 이동휘의 상해임시정부 참여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노령지역에는 대한국민회가 있었다고 얘기했는데, 이것은 전로한족중앙총회가 1919년 2월 25일에 개편된 것입니다. 그래서 상해임시정부에 이동휘가 부인을 한다는 것은 통합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합 전에 이 세 개 정부는 주도권에 대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즉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할 것인가 상해 정부 혹은 대한국민회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지요. 그런데 대한국민회를 주동하는 사람들은 비전투적인 귀화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인사회당의 당원들이 대한국민회 속에 많이 속해 있었어요. 이때 이동휘와 대한국민회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는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재당창을 하면서 한인사회당은 대한국민회에 대해서 상당히 강경하게 나갑니다. 앞으로 대한국민회가 우리와 같은 노선을 걷지 않고 계속 볼셰비키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협조하지 않으면 한인사회당 당원으로서 대한국민회 속에 들어 있는 당원들을 전부 빼내버리겠다는 것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대한국민회에 대해서는 상당히 저항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지기 전에 물밑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상해임시정부측과 대한국민회측 사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제일 정통성이 있었던 것은 한성정부였지요. 왜냐하면 13도 대표들이 국민대회를 통해서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국내에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은 있지만 조직을 확대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실질적인 주도권 싸움은 상해 정부와 대한국민회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1919년 1월 여운형이 신한청년단의 대표 자격으로 노령지역에 갔는데, 대한국민회는 2월에 성립되니까 전로한족중앙총회에 가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뭉쳐가지고 모이자.” 3 · 1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논의였어요. 그러자 여기서 또 파가 갈라집니다. 정부를 어디에 둘 것이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죠. 한쪽에서는 만주나 노령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야만 무장투쟁을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여운형, 안창호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상해에 두어야 한다 입장이었죠.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다가 3·1운동이 일어나니까 상해파들이 정부를 세웠고 노령 쪽에서 거기에 찬성한 사람들은 상해로 가버리는데, 이때 간 사람들이 이동휘, 조완구, 이동녕 같은 사람 들입니다. 만주에 있던 조소앙 같은 사람들과 합쳐져서 상해로 갑니다. 한형권이라는 사람이 쓴 글 중에는 대한국민회 우파가 상해임시정부를 건설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 겁니다. 조소앙이라든지 이동녕(대한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지낸 핵심인물) 같은 사람들이 와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니까 대한국민회 우파들이 상해임시정부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게 된 겁니다. 상해로 간 사람들은 ‘상해의 조직을 지금 체제가 아닌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조직으로 대폭 개혁을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문창범이라는 사람이 교통부장으로, 최재형이 재무부장으로 갔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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