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자처하며 활약

이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서 1924년 4월에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연맹’을 만듭니다. 아까 말씀드린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이정기 같은 사람들이 다 여기에 모입니다. 신채호는 여기에 들지 않았어요. 왜 들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만, 민족주의 이념을 다 버리고 무정부주의로 조직적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드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무정부주의연맹은 1930년에 한인청년동맹으로 이어집니다. 정화암도 이 출신입니다. 1927년 9월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이 만들어집니다. 동방 6개국의 120여 명이 모여서 만든 것인데, 여기에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연맹이 가담을 하고 단재가 대표로 참여하게 돼요. 이로 봐서 시기는 확실히 모르지만 아마 단재가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연맹에도 가담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가담한 이후 단재는 무정부주의에 따라 전혀 거리낌없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단재가 경찰에 붙잡힌 후의 신문조서 같은 것을 보면 1923년부터는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자임을 합니다. 이것은 이회영 선생의 기록에도 간접적으로 밝혀지고 있어요. 그리고 당시의 신문조서를 보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다는 것을 스스로 다 밝히고 있어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민중의 국제적인 연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방 6개국이 함께 모여서 활동하자는 것이죠. 이때부터는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하고 글도 쓰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글이 문제 없는 논문』, 『낭객 10년 만필』로 모두 『동아일보』에 실렸습니다. 이 글들은 여지없이 그가 무정부주의 사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재는 무정부주의를 자처하며 활동하고 역사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이 연구를 위해서 이동휘계가 받은 코민테른 자금 중 역사연구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단재에게 따로 지급되기도 합니다. 1928년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북경회의를 단재 신채호가 주최하여 개최합니다. 여기에서 유명한 무정부주의선언서를 작성하지요. 여기까지 오면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에 이의가 있을수 없겠죠. 이 무정부주의자연맹 북경회의에서, 무정부주의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사업자금이 필요한데 그것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를 의논한 결과 위조지폐를 만들자고 했어요. 위조지폐가 아니라 외국환을 바꾸는 것으로 해서 자금을 모으자고 했는데 마침 그 중에 우체국에 다니던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거짓 지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국제위채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단재는 잡혀 1936년에 옥중에서 별세합니다.

한 가지 남은 것은 조선혁명선언』의 내용입니다. 무정부주의를 가지고 민족운동을 하려고 했다는 것인데, 무정부주의의 민족운동 방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혁명선언』에 나타난 민족운동론

앞에서 의열단들이 어디 가서 폭파하는 활동을 많이 했다고 했는데,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을 쓴 이후 의열단으로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경찰에 인치가 된 사람들의 소지품에서는 대개 혁명선언서가 나왔다고 해요. 이것은 말하자면 의열단의 행동강령이라기보다 민족운동의 한방략을 선전하는 수단으로서 많이 배포되고, 단원들도 늘가지고 다니면서 자기운동의 규범으로 삼았던 것이었습니다. 조선혁명선언을 보면 크게 네 단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째 단락은 “강도 일본…”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적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인식한 거죠. 그래서 3·1운동 이전의 문건들, 부르주아운동의 문건들과 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특히 첫마디에서 경제침탈을 비판하고 특권계급의 타파를 얘기하는데 이것은 아마프루동 같은 사람들의 경제사회사상과 관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여기에선 사회진화론의 입장이 극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진화론은 잘 알다시피 약육강식 논리입니다. 부자, 승자들만 살아남는 것이죠. 따라서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이 살아남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계속 진화론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3· 1운동 이후에도 일본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론적인 대처를 못하면 결국 일본화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거죠.

단재는 3·1운동 이후에 무정부주의로 돌아서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사상적인 대응을 못하고 자치론이라든지 친일, 민족개조론으로 돕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사회진화론적인 사상이 3·1운동 이후에 다른 방향으로의 사상형태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딸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재는 사회진화론적인 것들을 극복하고, 사회과학적 지식에 바탕해서 특권계급과 경제적인 불평등을 타파하는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 흥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조선혁명선언첫마디에서 국가라는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말을 쓸 만한데 쓰지 않고 있어요. 민족이라는 말도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나키즘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둘째 단락에서는 타협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이라는 이광수의 글이 실리는데 이 글들은 자치론을 옹호하는 글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산업을 발달시키고 교육을 발달시키되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하자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나중에는 참정권운동으로 발전합니다. 단재는 입장들을 바로 비판하고 있어요. 당시에는 신일본주의, 동화주의 같은 것들을 목적으로 한 단체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갑자구락부라든지 동강회 같은 것들인데 이런 것들도 비판합니다.

셋째로는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하고 있어요. 단재는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교론이고 하나는 준비론이예요. 외교론은 이승만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1920년 12월 이승만이 상해로 돌아옵니다. 앞서 1921 년에 단재는 위임통치안 성토문이라는 것을 작성했다고 했는데, 지금 같으면 연판장 같은 것이지요.

위임통치안을 성토하고 말 것이 아니라 반대여론을 일정 형태로 갖추기 위해 연판장을 돌려 싸인을 받은 것이에요. 이승만을 절대 반대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준비론은 안창호 계열을 비판하는 겁니다. 단재는 이 두 입장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해서 창조파와 개조파가 갈려 있을 때는 그가 주동이 되어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를 인계하라고 합니다.

넷째 단락은 민중직접혁명론입니다. 여기에서 민중혁명은 민족운동의 한 방법론이죠. 그것은 크로포트킨에게서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단재는 선언서 제목에서도 나타났듯이 혁명 개념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혁명적 투쟁은 정규군 개념이 아니라 암살과 파괴와 폭동을 수단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정부주의적인 입장에서의 독립운동 방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밑에다 누구누구는 죽인다고 써놨는데, 이것을 의열단에서는 ‘칠가사’라고 해서 총독, 관리, 밀정, 매국노 등 일곱 부류를 처단해야 할 사람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적의 통치를 타파하자, 특권계급을 타파하자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단재의 무정부주의적인 방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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