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이범석의 활동

1946년 귀국 이후 이범석은 국가와 민족만이 유일하다는 국가지상, 민족지상을 내세워 민족청년단의 표어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그때부터 파시스트 또는 히틀러유겐트 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족청은 미군정에서 키워줬어요. 자금도 대주고 옷도 대주고 먹을 것도 줘가면서 키웠는데, 미군정은 장기적으로 한국을 통제할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서 극우군인 이범석이 귀국하니까 족청을 키워준 것 같습니다. 족청은 지금까지도 힘이 남아있어서 족청계 강모 등이 … Read more

김좌진이 무정부주의로 기울게 된 이유와 김두한과의 관계

우리나라는 중국과는 다르고 일본과도 달라서 아나키스트가 별 활동을 못했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 동경에서 아나키스트 모임이 있어서 흑도회 같은 것을 조직했습니다만, 별로 활동을 못하고 다만 박열이 일본 여자와 함께 천황을 죽이려 했다고 하여 크게 떠들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일제가 조작했다는 설이 강합니다. 국내에서도 아나키스트가 평양이나 다른 일부 지방에 있었다고 하지만 별로 활동한 것이 없습니다. 해방 … Read more

김좌진 장군, 만주에서 암살당하다

김좌진 장군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1925년 신민부를 설치하게 됩니다. 신민부는 그 당시 정의부, 참의부와 함께 삼부라고 하지요. 이것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만주라는 특수 대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부(府)라는 것은 정부를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임시정부와 비슷한 기능을 자임한 건데, 다만 임시정부보다는 군사활동을 중시했다 볼 수 있죠. 군사부와 민정부로 나뉘어 있는 데도 있는데 민정부에서는 세금도 걷고 교육도 시키고 … Read more

청산리 독립전쟁의 전개

다시 이야기를 청산리전투로 돌리지요. 중국측의 독립군 해산 요구에 홍범도부대와 북로군정서는 새 항일기지인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등의 밀림지대로 10월 상순까지 진군해 들어왔는데, 당시 독립군은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한 북로군정서 약 6백 명, 홍범도부대는 약 3백 명 등의 직속부대원과 연합부대를 합쳐 약 6백 ~ 8백 명, 기타 부대를 합쳐 약 2천 명이 포진하였고, 총출동한 일본병 2만 명 가운데 … Read more

청산리전쟁의 주인공은 왜 왜곡되었나

앞에서도 얘기를 했습니다만, 남한에서는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김좌진과 이범석이 이룬 것으로 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홍범도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연변에 갔다온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연변에서는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가 싸웠지 김좌진은 별로 싸운 것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해서 지나치게 홍범도 위주로 생각하는듯합니다. 김좌진추모회 쪽에서 연변에 청산리전투의 비를 세우러 갔다가 냉대를 받았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아마 이것은 그 지방에서 김좌진이 … Read more

청산리전투의 전야

남한에서는 청산리전투 하면 김좌진 장군을 연상하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들은 과연 누구인가하는 점에 초점을 두어 청산리전투를 살펴보겠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부대는 북로군정서에 속해 있습니다. 1910 년대에 북간도 일대를 포함해서 만주 일대는 대종교 신자들이 많았어요. 그 중 서일은 대종교에서 신망받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서일이 중심이 되어서 중광단(光團)을 조직했고, 그것이 3 · 1운동 후에 정의단으로 … Read more

독립전쟁의 개시 – 봉오동 승첩

이렇게 해서 청산리전투와 함께 1920 년대 최대의 전투라고 얘기되는 봉오동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봉오동전투는 두 개의 규모로 벌어졌습니다. 하나는 삼둔자전투라고 해서 안산과 고려령에서 붙은 전투를 가리키고, 그다음에 바로 옆에 있는 봉오동으로 끌고가서 거기서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를 일컫는데, 이 두 개를 합쳐서 봉오동전투라고 합니다. 당시 조선군사령부는 나남과 용산 두 군데에 있었는데 나남에 있는 것이 유명한 19사단입니다. 이전투에는 … Read more

홍범도부대 왜군을 공격하다

홍범도 장군은 장백산맥에 있는 봉오동을 기지로 해서 1919년 8, 9월에 혜산진, 갑산 일대의 수비대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10월에는 강계, 만포진을 습격했고 자성에서는 일본군과 3일간이나 격전을 벌여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고 합니다. 어떤 책에는 혜산진도 한때 장악했다느니 만포진도 장악했다느니 하는 말이 나와 있는데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 지역을 장악했던 것 같지는 않고 다만 홍범도부대가 워낙 날쌘 … Read more

3·1운동 이후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

이제 3·1운동 이후의 독립전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얘기한 것처럼 1910 년대는 우리 역사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때도 노령, 연해주에서 열심히 싸웠고 신흥군관학교에서는 많은 인재를 양성했지만, 홍범도도 독립군 전투를 몇 번밖에 못할 정도로 곤경을 겪었어요.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인 조류, 즉 자유와 민족해방, 민주주의를 위한 도도한 대세가 만주, 북경, 연해주, 조선을 휩쓸기 시작했고, 특히 3·1운동은 … Read more

광복회 조직과 독립운동

1913년에 채기중, 유창순, 김상옥 이런 분들이 풍기에서 광복회를 조직했어요. 풍기는 정감록』에 의하면 길지다. 피난지지다 해서 외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광복회를 만든 겁니다. 대한광복회의 대표적인 인물은 박상진으로, 이분은 대구를 중심으로 해서 이미 대한의군부, 국권회복단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상진과 채기중, 양쪽 세력이 합쳐서 1915 년 7월에 만든 것이 유명한 대한광복회입니다. 박상진이 총사령관이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