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미래도 예측 할 수 있다.

우리가 유년 시대부터 노년 시대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거울삼아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상을 예측해 보면 어떤 일정한 동일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일 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상을 추측해 보아도 역시 동일 궤도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으며 한 사람도 그 공식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없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 Read more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간의 알력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상해임시정부에서 벌써 짜놓고 자기 식대로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문창범과 최재형은 돌아와서 1920년 2월 대한국민회를 다시 부활시킵니다. 여기서 대한국민회 사람들과 이르쿠츠크파 사람들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동휘와 이동휘를 따라 지휘부로 상해로 옮긴 한인사회당은 계속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잔존합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1921년 5월 한인사회당이 발전적으로 해체하며 창당됨)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알력은 실제로 여기에서부터 생기는 거예요. 이동휘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 Read more

3·1운동의 영향으로 재창당되는 한인사회당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운동 역시 이지역에 굉장한 충격을 주었어요. 3.1운동 이후인 1919년 4월 말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사회당대표자대회라는 것이 열립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재창당이 됩니다.이 대회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인사회당 당원이 1만 명 이나 된 것입니다. 1918년 6월에서 1919년 사이에, 그러니까 1년이 채 못 되어서 볼셰비키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하부구조를 갖추게 된 거죠. 그리고 한인사회당에 신민당이 … Read more

러시아 한인세력 두 부류로 분리

노령 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63년 입니다. 1863년에 13가구가 처음으로 신한촌을 이루게 되는데 망명 후 이동휘의 주요 활동무대가 된 곳도 이곳입니다.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하면서 이상설이 주도했던 노령지역 조선인들의 일종의 정치사회단체였던 권업회 사업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1914년 러시아는 노령지역에서의 모든 조선인들의 운동을 금지했습니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거든요. 그러다가 이 금지가 풀린 것은 1917년 2월혁명이 일어나고부터입니다. … Read more

자유시 참변으로 공산주의에 반대

지금까지는 단재의 민족주의운동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그렇다면 공산주의자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는가를 보면, 여기에 대해서는 아주 반대합니다.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사대주의라는 거죠. 단재가 공산주의에 반대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공부하면서 느끼기로는 1921년 6월에 일어났던 자유시 참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유시 참변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면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이긴 후 경술참변으로 무장단체들이 북만주로 쭉 … Read more

아나키스트 자처하며 활약

이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서 1924년 4월에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연맹’을 만듭니다. 아까 말씀드린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이정기 같은 사람들이 다 여기에 모입니다. 신채호는 여기에 들지 않았어요. 왜 들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만, 민족주의 이념을 다 버리고 무정부주의로 조직적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드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무정부주의연맹은 1930년에 한인청년동맹으로 이어집니다. 정화암도 이 출신입니다. 1927년 9월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이 만들어집니다. 동방 … Read more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

이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창조파는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워서는 외교밖에 안된다. 정부를 노령이나 북만주로 옮겨서 우리 민족이 사는데서 독립운동을 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직접적으로 나온 자료는 없습니다만, 이것은 말하자면 무장투쟁 독립노선이지요. 거기에 반해서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상해에 그냥 두되 이것을 개조하자는 입장입니다. 개조파 사람들은 대개 여운형, 안창호 등인데, 안창호는 초기 그러니까 세 정부가 통합해서 9월에 출발하기 … Read more

군사통일주비회 결성과 국민대표회의 개최

1921년에는 군사통일주비회를 만듭니다. 당시 군사통일주비회를 만들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려면 상당히 긴데, 간단히 말씀드리면 1920년에 유명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있게 됩니다. 아 청산리전투를 겪고 나자 일본은 만주지역을 쓸어버립니다. 이를 경술참변이라고 하죠. 당시 만주에는 대한독군부, 대한독립군, 보합단 등 무장투쟁세력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는데 일본이 무자비하게 공격해들어오니까 그 단체들이 모두 쫓겨갑니다. 일본은 사람을 있는 대로 다 죽여버렸어요. 요즘 중국에서 나온 … Read more

상해임시정부에 참여

그런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정부가 3개 생겼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정부가 7개 생깁니다. 대개 실체가 밝혀진 것은 5개이고 2개 정도는 전단(傳)정부라고 해서 종이를 가지고 ‘우리는 이런 정부를 만들었소’ 하고 퍼뜨리는 것이죠. 이런 정부까지 합치면 3 · 1운동 이후 7개의 정부가 생겼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3개로서, 하나는 상해임시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한성정부, 그리고 또 하나는 노령의 … Read more

1900년대 초기 애국계몽운동에 투신

원래 큰 제목이 무장투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단재는 무장투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역사학자이고 민족운동가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총을 들고 싸웠다든지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 대해서는 ‘무장투쟁론’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신채호는 1900년대 후반기에 전개된 민족운동의 두 가지 양상, 즉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던 분입니다. 대한매일신보』라든지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