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

이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창조파는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워서는 외교밖에 안된다. 정부를 노령이나 북만주로 옮겨서 우리 민족이 사는데서 독립운동을 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직접적으로 나온 자료는 없습니다만, 이것은 말하자면 무장투쟁 독립노선이지요. 거기에 반해서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상해에 그냥 두되 이것을 개조하자는 입장입니다. 개조파 사람들은 대개 여운형, 안창호 등인데, 안창호는 초기 그러니까 세 정부가 통합해서 9월에 출발하기 … Read more

군사통일주비회 결성과 국민대표회의 개최

1921년에는 군사통일주비회를 만듭니다. 당시 군사통일주비회를 만들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려면 상당히 긴데, 간단히 말씀드리면 1920년에 유명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있게 됩니다. 아 청산리전투를 겪고 나자 일본은 만주지역을 쓸어버립니다. 이를 경술참변이라고 하죠. 당시 만주에는 대한독군부, 대한독립군, 보합단 등 무장투쟁세력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는데 일본이 무자비하게 공격해들어오니까 그 단체들이 모두 쫓겨갑니다. 일본은 사람을 있는 대로 다 죽여버렸어요. 요즘 중국에서 나온 … Read more

상해임시정부에 참여

그런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정부가 3개 생겼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정부가 7개 생깁니다. 대개 실체가 밝혀진 것은 5개이고 2개 정도는 전단(傳)정부라고 해서 종이를 가지고 ‘우리는 이런 정부를 만들었소’ 하고 퍼뜨리는 것이죠. 이런 정부까지 합치면 3 · 1운동 이후 7개의 정부가 생겼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3개로서, 하나는 상해임시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한성정부, 그리고 또 하나는 노령의 … Read more

1900년대 초기 애국계몽운동에 투신

원래 큰 제목이 무장투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단재는 무장투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역사학자이고 민족운동가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총을 들고 싸웠다든지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 대해서는 ‘무장투쟁론’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신채호는 1900년대 후반기에 전개된 민족운동의 두 가지 양상, 즉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던 분입니다. 대한매일신보』라든지 … Read more

1950년대 이범석의 활동

1946년 귀국 이후 이범석은 국가와 민족만이 유일하다는 국가지상, 민족지상을 내세워 민족청년단의 표어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그때부터 파시스트 또는 히틀러유겐트 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족청은 미군정에서 키워줬어요. 자금도 대주고 옷도 대주고 먹을 것도 줘가면서 키웠는데, 미군정은 장기적으로 한국을 통제할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서 극우군인 이범석이 귀국하니까 족청을 키워준 것 같습니다. 족청은 지금까지도 힘이 남아있어서 족청계 강모 등이 … Read more

김좌진이 무정부주의로 기울게 된 이유와 김두한과의 관계

우리나라는 중국과는 다르고 일본과도 달라서 아나키스트가 별 활동을 못했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 동경에서 아나키스트 모임이 있어서 흑도회 같은 것을 조직했습니다만, 별로 활동을 못하고 다만 박열이 일본 여자와 함께 천황을 죽이려 했다고 하여 크게 떠들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일제가 조작했다는 설이 강합니다. 국내에서도 아나키스트가 평양이나 다른 일부 지방에 있었다고 하지만 별로 활동한 것이 없습니다. 해방 … Read more

김좌진 장군, 만주에서 암살당하다

김좌진 장군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1925년 신민부를 설치하게 됩니다. 신민부는 그 당시 정의부, 참의부와 함께 삼부라고 하지요. 이것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만주라는 특수 대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부(府)라는 것은 정부를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임시정부와 비슷한 기능을 자임한 건데, 다만 임시정부보다는 군사활동을 중시했다 볼 수 있죠. 군사부와 민정부로 나뉘어 있는 데도 있는데 민정부에서는 세금도 걷고 교육도 시키고 … Read more

청산리 독립전쟁의 전개

다시 이야기를 청산리전투로 돌리지요. 중국측의 독립군 해산 요구에 홍범도부대와 북로군정서는 새 항일기지인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등의 밀림지대로 10월 상순까지 진군해 들어왔는데, 당시 독립군은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한 북로군정서 약 6백 명, 홍범도부대는 약 3백 명 등의 직속부대원과 연합부대를 합쳐 약 6백 ~ 8백 명, 기타 부대를 합쳐 약 2천 명이 포진하였고, 총출동한 일본병 2만 명 가운데 … Read more

청산리전쟁의 주인공은 왜 왜곡되었나

앞에서도 얘기를 했습니다만, 남한에서는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김좌진과 이범석이 이룬 것으로 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홍범도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연변에 갔다온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연변에서는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가 싸웠지 김좌진은 별로 싸운 것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해서 지나치게 홍범도 위주로 생각하는듯합니다. 김좌진추모회 쪽에서 연변에 청산리전투의 비를 세우러 갔다가 냉대를 받았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아마 이것은 그 지방에서 김좌진이 … Read more

청산리전투의 전야

남한에서는 청산리전투 하면 김좌진 장군을 연상하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들은 과연 누구인가하는 점에 초점을 두어 청산리전투를 살펴보겠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부대는 북로군정서에 속해 있습니다. 1910 년대에 북간도 일대를 포함해서 만주 일대는 대종교 신자들이 많았어요. 그 중 서일은 대종교에서 신망받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서일이 중심이 되어서 중광단(光團)을 조직했고, 그것이 3 · 1운동 후에 정의단으로 … Read more